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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지대(遲遲臺)와 지지대비(遲遲臺碑)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6. 8. 26. 05:39

    지지대(遲遲臺)와 지지대비(遲遲臺碑)


    지지대비는 조선(朝鮮) 정조(正祖)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1807)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이다.
    조선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능인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보며 이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篩國)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전액을 썼다.

    비운의 생애를 마친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지지대비는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번지

     

     

     

     

     

     

     

     

     

    계단 하부에 새겨진 지지대(遲遲臺) 음각자(陰刻字)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階下馬)


    왕조때 말을 탄 사람이 그 앞을 지날 때 누구나 말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겨 세운 비석
    (관직의 높고 낮음없이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비석엔 6.25 한국전쟁시 총탄 흔적.

     

     

     

    지지대(遲遲臺)와 지지대비(遲遲臺碑)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개이며 수원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한 지지대고개는

    정조대왕과 얽힌 전설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유서깊은 장소지만, 세월이 흐르고 1번 국도를 건설하며

    지지대고개를 깎아 내리는 과정에서 지지대 관련 유물은 1807년에 세워진 지지대비와 하마비만 남게 되었다.

    지지대고개는 원래 사근현(沙斤峴)이었는데, 정조대왕에 의해 1795년에 미륵현(彌勒峴)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796년에 지지현(遲遲峴)으로 고쳤다. 지지현으로 고친 후 이곳에 표석과 장승을 세웠는데,

    이 표석과 장승이 현륭원 원행길의 첫 번째 이정표였던 셈이다.

    1792년(정조 16) 1월 26일, 어가가 사근현(沙斤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쉴 때에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래 가슴이 막히는 병이 있어 궁궐을 나올 때에 꽤 고통스러웠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다소 풀리어 가슴 막히는 증세도 따라서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 지역은 바로 수원의 경계이다.

    말에서 내려 머무르며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대저 나의 행차를 지연시키려는 뜻이다.” 하고,

    인하여 그 지역을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命名)하였다.

    1795년(정조 19) 윤2월 16일자 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번 현륭원을 참배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당도할 때면 고삐를 멈추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채 나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하였다.

    이번 행차에서 미륵현의 윗쪽에 앉은 자리를 빙 둘러 대(臺)처럼 되어 있는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

    이 뒤로는 행행(幸行)하는 노정(路程)에 미륵현 아래에다 지지대라는 세 글자를

    첨가해 넣도록 할 일을 본부(本府)와 정리소(整理所)에서 잘 알아서 하도록 하라.”

    ‘한글본 뎡리의궤’에는 1796년 1월 지지대부터 원소(園所) 동구(洞口)까지 일체로 표석을 세워 지명을 새기라는 명이 있었고,

     ‘화성성역의궤’에는 5월에 18곳에 표석을 세웠다는 보고서를 올렸는데,

    지지대고개(遲遲峴)와 지지대(遲遲臺)란 표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성지’를 보면 지지대는 지지현 아래 10여보 서쪽에 있으며 축대 면에 지지대를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쯤 되면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리송하다. 알기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래 고개이름인 사근현에서 미륵현으로 다시 지지현으로 고친 것이며,

    왕의 행차가 지지현에 당도할 때면 행차가 멈추고 오래도록 떠나지 못해 그곳을 지지대라고 명명한 것이다.

    미륵현 위쪽에 왕이 앉은 자리를 빙 둘러 대(臺)처럼 되어 있는 곳을 지지대라 명하고 축대에 ‘지지대’를 새기게 한 것이다.
    고개마루에 ‘지지현 표석’, ‘장승’, ‘지지대 표석’, 10여보 아래에 ‘지지대 축대’가 동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7년에 지지대비와 하마비가 세워졌고 현재 지지대고개에 가면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지지대비와 하마비 뿐이다.

    그런데 지지대비를 답사하다보니 도로에서 지지대비로 올라가는 계단에 ‘지지대’라고 새긴 축대가 계단 아래쪽에 보인다.

    1950년대 지지대비 사진을 보니, 첫 번째 계단에 ‘지지대’라 새긴 것이 보이고, 좌측에 하마비가 보인다.

    축대에 새긴 ‘지지대’ 글씨와 현재 지지대비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지지대’ 글씨는 같은 것으로 보이며,

    해서체로 쓴 글씨를 자세히 보면 정조대왕 당시의 풍모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정조대왕 때 새긴 ‘지지대’란 생각이 들었다.


    도로를 낼 때, 혹은 지지대비에 올라가는 계단을 쌓을 때 축대를 계단에 끼워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현장에서 실제 계단의 사이즈를 보면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의 현륭원 행차길 중요 지점마다 세운 18개의 표석 중 5개만 현존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지현 표석’, ‘장승’, ‘지지대 표석’은 없어졌지만

    ‘지지대’란 축대만이 쓸쓸히 남아서 정조대왕의 효심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지지대(遲遲臺) 고개 - 노재연

     

    능행차 긴 행렬의

    더딘 길 높은 고개

     

    어가도 헐떡이고

    대취타도 숨이 차고

     

    늘어선

    어가 행렬에

    왕의 한숨 능에 닿네

     

    지지대(遲遲臺) 고개 : 의왕과 수원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조대왕이 능행차 가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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