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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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지(春塘池)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22. 19:10
춘당지(春塘池) 춘당지(春塘池)는 창경궁(昌慶宮) 후원(後苑)에 있는 호리병 모양의 연못으로 대춘당지는 1909년에 내농포(內農圃) 속한 11개의 논을 하나로 만든 것이다. 윗 연못이 1,107㎡, 아래 연못이 6,483㎡이다. 연못 속의 섬(366㎡)은 1984년에 조성한 것이다. 내농포는 임금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궁궐 안에 둔 논과 뽕밭이다. 춘당지가 있는 이곳은 원래 연산군(燕山君)이 서총대(瑞蔥臺)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단한 곳이다. 그 후 권농장(勸農場)의 논이 있었는데 연못으로 만들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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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태실(成宗 胎室) 및 태실비(胎室碑)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9. 19:12
성종 태실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팔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寶珠)로 장식하였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태실(成宗大王胎室)"이라 새겨져 있다. 成化 七年 閏 九月 日立 - 성화 7년(1471년, 성종 2년) 윤 9월 어느 날 세움 萬曆 六年 五月 日 改立 - 만력 6년(1578년, 선조 11년) 5월 어느 날 고쳐 세움 順治 九年 十月 日 改立 - 순치 9년(1652년, 효종 3년) 10월 어느 날 고쳐 세움 道光 三年 五月 日 改立 - 도광 3년(1823년, 순조 23년) 5월 어느 날 고쳐 세움 성종 태실비는 1471년에 세운 후 3차례 고쳐 세웠다. ※ 성화(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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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8. 20:13
영춘헌은 본채 5칸이 남향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으며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놋상 및 주전자 – 유기장 보유자 이형근 작 만자문 촛대 – 유기장 보유자 이형근 작 주칠 원형 소반 – 칠장 박강용, 소목 이건무 작 백자 그릇 – 공예작가 김윤지 누비 방석 – 공예작가 정숙희 작 아트디렉터 – 김주일 복자발 – 염장 보유자 조대용 작 나주반 – 소반장 보유자 김춘식 함 – 칠장 이수자 권영진 작 화문석 – 공예작가 박윤환 작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이 일대는 생활공간이 밀집된 영역이었다. 집복헌은 후궁의 생활공간이었다. 현재 집복헌은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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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풍기대(風旗臺)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7. 21:13
보물, 풍기대(風旗臺)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뒤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풍기대는 대(臺)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구이다. 1770년(영조 46)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탁자 모양의 돌 위에 긴 팔각기둥을 세우고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원래 창덕궁 통제문 안에 설치하였다가 해방 전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풍기대는 높이 228.1cm이며, 하부 대석은 높이 92.4cm이고, 넓이는 가로·세로 모두 62cm이다. 상부 팔각기둥은 높이가 135.7cm, 상부 구멍 지름은 11cm, 깊이가 33cm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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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明殿)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6. 21:06
보물,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明殿) 내전(內殿)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통달하여 밝다’라는 뜻이며,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賜藥)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된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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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창경궁 양화당(昌慶宮 養和堂)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5. 20:10
사적, 창경궁 양화당(昌慶宮 養和堂) 양화당은 ‘조화로움을 기른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1878년에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 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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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창경궁 환경전(昌慶宮 歡慶殿)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4. 20:10
사적, 창경궁 환경전(昌慶宮 歡慶殿) 환경전의 환경(歡慶)은 ‘기쁘고 경사스럽다‘라는 뜻으로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1544년에 중종과 1645년에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순조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 34)에 다시 중건되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梓宮, 관)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환경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 기둥 높이 10척(尺)의 단층 팔작 기와집으로 현재는 바닥 전체에 마루를 깔아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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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창경궁 경춘전(昌慶宮 景春殿)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13. 20:12
사적, 창경궁 경춘전(昌慶宮 景春殿) 경춘전의 경춘(景春)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1484년(성종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純祖)의 어필(御筆)이다.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