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미세한 폭음를 듣고 발견한 "철원 제2땅굴"
    국내 나들이/안보 현장(安保 現場) 2008. 11. 13. 05:32

    미세한 폭음를 듣고 발견한 "철원 제2땅굴"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북쪽13km에 위치한 제2땅굴은 1975년 3월19일에 발견되었다.


    철원 북쪽 비무장지대(DMZ)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출구는 세 갈래로 분산시켜 놓았다.


     이 땅굴은  너비 2.1m,높이 2m,깊이 지하50~160m,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향 구조물이다.


    1시간에 3만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차량,야포,중화기 등은 물론 탱크까지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이다.


    땅굴은 당시 최전방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군인이 땅속에서 울리는 미세한 폭음을 청취함므로써 발견된 것으로


    25일간의 끈질긴 굴착작업 끝에 찾아낸 것이다.


    당시 북한은 제2땅굴에 대해서도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극구 부인하였으나


    귀순한 북한 노동당연락부 소속 김부성씨가 자신이 직접 측량을 했고


    "콤푸레샤" 요원으로 땅굴작업에 동원 되었다고 증언함으로써 북한의 선전이 거짓임을 입증하였다.


    제2땅굴 수색 중에도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한국군 7명이 희생되었으며


    현재 이 땅굴은 철원군에서 운영하는 안보관광 코스중에 하나로 매년 수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제2땅굴 입구

     

     

     

    제2땅굴 입구의 땅굴 설명

     

     

     

    제2땅굴 발견경위 및 굴착 증거

     

     

    제2땅굴은 서울 동북방 100km 지점에 위치하여 1973년 11월 20일

    당시 6사단(사단장:정명환 육군 소장) 장병이 경계작전 수행 중 지하로부터 미상의 폭음을 감지,

    시추공으로 끈질긴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19일 북한의 기습남침용 땅굴의 전모가 드러난 사건이다.

    땅굴 발견 당시 북한은 외부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남북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남한을 안심시키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무력 적화통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땅굴을 굴설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취해 전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사건이다.


     

     

    제2땅굴 입구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된 정전협상은 2년이란 오랜 시간을 끈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회담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William K Harison) 중장과

    북한군 수석대표 남일은 세 통의 정전협정서와 부속 협정서에 서명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며 종결됐다.

    전쟁으로 남북한은 심각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고 정신적으로도 큰 상처를 남겼다.

    제2땅굴 입구의 정전 20187일은 1년을 365일로 나누오 보면 약 55년이 지난 긴 세월이다.



     

     

    북한에서 땅굴을 팠다는 증거는  갱도내 배수로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향하여 흐르고 있으며

    갱도 공사후 물을 빼내는 이중 작업을 피하기 위해 1000m당 약 3도의 경사를 남측으로 높게하여 공사를 실시 했다.


                 

    원래의 땅굴과 구분하기 위해 남쪽이 판 것을 '역(逆)갱도', 원래 땅굴을 '적(敵)갱도'라고 부른다.

    '땅굴'이 곧 '갱도(坑道)'인데 북쪽이 팠다는 것은 '땅굴'로 부르고, 남쪽이 판 것은 '갱도'로 부르고 있다.


     

     

    북에서 남으로 파고 들어온 장전공 모습


     

    땅굴은 북한이 전면적 기습전과 후방공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로 2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땅굴사업은 1971년 9월 25일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내려진

    “속전속결전법을 도입 후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는 김일성의 ‘9 ·25교시’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또 하나의 남침용 땅굴이라는 증거는 다이너마이트 장전공의 방향이 북에게 남으로 향하고 있어

     북에서 남측을 향해서 폭발을 하면서 갱도 공사를 했다는 증거이다.


     

     

    북한과 우리나라의 굴착 공법은 완전히 다르다.

    북한이 파 내려 온 구간은 폭발 공법을 이용하여 벽면이 그을린 반면

    우리나라는 역굴시 대형 굴착기를 이용하여 벽면 색깔이 변함이 없으므로

    굴착 구멍만 봐도 분명히 북한측에서 팠다는 것이 증명된다.


     

    1974년 11월 11일 제1땅굴 발견이후 강원도 철원지역에도 땅굴이 있을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당시 농업진흥공사가 지하수개발을 위해 도입한 시추장비를 투입하여 45개의 시추공을 뚫어

    이중 7개가 적의 남침용 땅굴에 정확히 관통되었고,

    1975년 3월1일부터 24일까지 24일에 걸쳐 현대건설과 우리군이 북한군의 땅굴을 찾아내게 되었다.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


     

     

    통일 염원 및 성취 우물

     

    이 우물은 각자 소원을 기원하면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행운을 가져오고

    미래 조국통일 축북이 성취된다는 우물이다.


     

     

    제2땅굴 단면도

     

     

     

    땅굴안에 설치 된 제1차단벽을 알리는 문구


                 

     

     

    제2땅굴 입구의 주차장.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