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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어진(正祖大王御眞)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09. 3. 25. 07:05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어진(正祖大王御眞)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는 조선의 제 22대 임금으로서 휘는 산(蒜),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20자)

    (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조선제 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으며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소론을 지지하여,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에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0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조선 진종의 양아들로 입적되고 1775년에는 손자의 권력 기반을 마련해 주려는 할아버지 영조의 배려로

    그를 대신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 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고.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주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웠으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의 원수이자 여당인 노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어,

    봉건적 특권을 약화시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우문지치(右文之治:학문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作成之化:만들어 냄으로서 발전을 꽤함)”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으며.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고.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다.

     

    또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시켰으며,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고,

    토축()된 읍성()인 수원화성 성곽을 새로이 축조하여 화성(城)이라 하는 등의 치적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음력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개혁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가 묻혀 있는 융릉의 옆이다.

    처음에 받은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대한제국 때인 189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고 난 후에,정종에서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다.

    한편,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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