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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선비들의 숨결을 들으며...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3. 4. 7. 06:40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선비들의 숨결을 들으며...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書院)으로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講學)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소수서원은 사적 제55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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