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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산성지(龜山聖地)의 순교성인,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3. 7. 14. 05:54

    구산성지(龜山聖地)의 순교성인,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김성우(金星禹) 성인은 경주김씨 계림군파(鷄林群波) 15대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경기도 광주 구산(지금의 하남)마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안토니오고, 이름은 우집(禹集)이며, 성우(星禹)는 그의 자다.

    그는 평소 성품이 너그러워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1830년 경 두 동생인 만집(萬集), 문집(文集)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삼형제의 전교활동으로 구산마을이 천주교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된다.

    김성우 성인은 평소 무슨 일을 하든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돕기 위해 한 때 서울로 이주하여 생활하기도 한다.

    그 후 다시 구산마을로 내려온 김성우 성인은 자신의 집에 강당을 마련하고

    한동안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를 그곳에 거처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방 신부에게 우리말과 우리나라의 풍습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성우 성인의 전교활동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그의 동생들과 사촌동생 주집이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된다.

    그리고 잠시 지방에 피신해 있던 김성우 성인도 가족들과 함께 관헌에게 체포되어 압송된다.

    그의 형제들 모두가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옥에 갇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그의 동생 만집과 문집, 그리고 사촌동생인 주집은 혹독한 고문을 받아 옥사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옥중에서도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배교는커녕 오히려 옥중에서 전교활동을 펴는 그의 행동이 곱게 보였을리 없다.

    그는 문초를 당하면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고 의연하게 말했다고 전한다.

    1841429(39) 형리들은 김성우 성인이 곤장 60대를 맞고도 배교를 하지 않자

    다음날 교수형에 처하니 그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한양의 포도청에서 사학(천주교)의 괴수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김성우 성인의 유해는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인 구산마을에 안장된다.

    구산성지(龜山聖地)는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관리하여

    박해시대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최근 성지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공사를 시작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기해박해 이후 200여년 동안 전통적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해왔던 곳이기도 하다.

    김성우 순교자는 1925년 7월 25일 교황청의 시복조사를 거쳐 복자위에 오르게 되며,

    그의 유해는 다시 구산마을에서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 교정으로 이장된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창설 제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103위와 함께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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