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부소산성(扶蘇山城)의 반월루(半月樓)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3. 8. 14. 05:08

    부소산성(扶蘇山城)의 반월루(半月樓)

     

    백마강(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남쪽 마루에 있는 부소산성 반월루는

    부여 시가지 전경(全景)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이다.

    1972년에 지은 2층 누각으로 반월루 편액은

    임자(壬子, 1972) 정월(正月)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썼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반월루기(半月樓記)

     

    반월성(半月城)에 기대서서 멀리 바라보니 떼지어 날으던 기러기는 간데없건만

    갈대 우거졌던 옛 구룡평야(九龍平野)는 벼이삭이 바다를 이루고,

    수북정(水北亭)에 굽이치는 맑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오는 돛단배는 흔히 못보는 풍경(風景)이요.

    저녘의 노을빛에 붉게 타오르는 백제탑(百濟塔)이 눈앞에 있고,

    잔잔히 흐르는 백마강(白馬江)에 잠긴 달은 물속에 비치니 달빛이 다칠세라 물은 조심조심 흐르고,

    정막을 깨는 고란사(皐蘭寺)의 새벽 종소리는 낙화암(落花巖)에서 잠든 두견새를 깨우고,

    사비루(泗?樓) 넘어 반월성(半月城)을 타고 나그네의 귓전을 울리며 아지랑이 아롱거리고,

    봄나비 춤을 추며 꽃향기를 찾아 사비성(泗?城)으로 태자(太子)골을 넘나드니 여기가 부소산(扶蘇山)이라오.

     

    이슬비 내리는 부소산(扶蘇山)을 다시 보고 싶건만 이곳에 정자(亭子)없음이 한(恨)이었다가

    전 군수 전준기 씨(前 郡守 田俊淇 氏)의 애쓴 보람으로 성루지(城樓址)에 정자(亭子)가 서게되어

    그 이름은 성 따라 반월루(半月樓)라 하였으니,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시여 잠시 쉬었다가 가시오.

     

    서기 1972년 2월 일

    부여군수 정찬경(扶餘郡守 鄭燦璟) 씀

     

     

    반월루기(半月樓記)

    회고(回顧)하면 8.15(.一五)해방(解放)이후 풍우(風雨) 천년(千年)의 향기(香氣)를 간직한 고도(古都) 부여(扶餘)

    백제문화(百濟文化)가 찬란(燦爛)하게 꽃이 피어 부소산(扶蘇山)이 단장(端裝)되고 명승(名勝)을 복원(復元)하여

    고적보존운동(古蹟保存運動)이 태동(胎動)할 뿐 아니라 한국 정신사(韓國 精神史)의 근간(根幹)

    백제정신(百濟精神)의 재발견(再發見)과 더불어 민족문화(民族文化) 건설(建設)이 추진(推進)되고

    조상(祖上) 전래(傳來)의 민족정신(民族精神)이 날로 새로워지니 운집(雲集)하는 국내외 관광객(觀光客)은 물론(勿論)

    계절적(季節的)으로 소요(逍遙)하는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음풍영월(吟風영月)

    사학인(史學人)의 휴식연찬(休息硏鑽)에 협력(協力)의 당위성(當爲性)으로 누각(樓閣)의 건립(建立)이 요청(要請)되었다.

    공사내역(工事內譯)을 개설(槪說)하면 예산(豫算)은 국고보조금(國庫補助金) 5백만 원으로

    문화재기술 등록자(文化財技術 登錄者)로 시공(施工)하고, 규모(規模)는 사자루(泗?樓)를 모방(模倣)하여

    서기 197151일 착공, 동년 8월말에 준공했으며 명칭은 반월루(半月樓)라 제의(提議),

    지사(知事)의 승인(承認)을 얻어 명명(命名)하고, 위치는 일반의 편리와 조망(眺望)의 효율성에 역점을 두었다.

    주변의 풍경(風景)을 일별(一瞥)하니 남()으로 반월성(半月城)에 사비수(泗비水)

    일의대수 유유(悠悠)히 흘러 반달 모양의 백색 띠를 두르고,

    (西)으로 수북정(水北亭)은 홍정(紅亭)이 우뚝 솟아 청강(淸江)에 비치니 수궁(水宮)의 일면(一面)이라,

    ()으로 낙화암(落花岩)에 두견(杜鵑)새는 촉도(蜀道)가 어려워라,

    하염없이 슬피 울어 삼천궁녀(三千宮女)의 애환(哀歡)을 달래며 고란사(皐蘭寺)의 새벽 종()소리는

    혼탁(混濁)한 속세(俗世)를 일깨우는 듯 백마강(白馬江)의 밝은 달은 굽이치는 은파(銀波) 속에 무심(無心)히 황홀(恍惚)하다.

    ()으로 백제탑(百濟塔)은 황량(荒凉)하게 고색(古色)이 창연(蒼然)하니 한나라의 흥망사(興亡事)가 덧없음을 실감(實感)한다.

    7백년 내려온 부여성(扶餘城) 옛터는 동양문물(東洋文物)의 온축지(蘊蓄地)로 백제문화(百濟文化)

    멀리 일본(日本) 비조문화(飛鳥文化)를 형성하고 지난날의 일본문화를 창출(創出)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족문화(民族文化)는 민족중흥(民族中興)의 역사적(歷史的)인 시점(時點)에서

    민족(民族)의 긍지(矜持)와 슬기를 모아 백제문화창달(百濟文化暢達)에 기여(寄與)함을 절감(切感)케 한다.

    끝으로 조상(祖上)의 빛난 얼과 선열(先烈)들의 발자취를 이어받아 면면(綿綿)히 맥()을 이은 뿌리 깊은

    이 땅에서 반월루(半月樓)를 길이 보전(保全)하고 역사의 땅 이곳 부여를 찾는 뜻있는 인사들의 휴양과 감회로써

    백제문화(百濟文化)의 진수(眞髓)를 채득(採得)하고 널리 선양(宣揚)있기를 기대(期待)하면서 이만 줄인다

    서기 198911월    전 부여군수 전준기(前 扶餘郡守 田俊淇)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