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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행궁 득중정(華城行宮 得中亭)
    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13. 12. 7. 05:00

    화성행궁 득중정(華城行宮 得中亭)

     

    1789(정조 13)에 처음 짓고, 이듬해 정조가 이곳에서 활을 쏘아

    4발 모두를 적중시켜 득중정(得中亭)’이란 편액(扁額)을 내렸다.

    그러나 득중정은 1794(정조 18) 가을에 노래당(老來堂) 뒤쪽으로 옮겨짓고 어서(御書)의 편액을 걸었다.

    513컨의 건물과 부사(附舍) 7, 도합 20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댓돌 앞에는 동서 길이 8, 남북 넓이 6척의 어사대(御射臺)가 있는데,

    정조는 1795(정조 19)1797(정조 21) 원행(園行) 때에도 여기에서 활을 쏘는 행사를 가졌다.

    정조대왕능행도(正祖大王陵行圖)’ 중에 수록된 득중어사도(得中御射圖)’는 정조 19년의 어사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득중정은 사정(射亭:활터에 세운 정자)으로 노래당 남쪽과 이어져 서쪽으로 꺽여진 지점에 세웠다.

    득중정이란 편액은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썼다.

    득중정은 예기(禮記)’ 46 ‘사의(射義)’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爲諸侯 不射中 則不得爲諸侯)”라고 한 구절에서

     ()’자와 ()’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선비들이 활쏘기를 하는 주목적은 덕행을 관찰하는 것으로 정곡(正鵠)을 맞춘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 덕이 함양되어 있어서 모든 행동이 도리에 맞는 것으로 여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得中亭)’이라고 한 것이다.

    상량문에는 용대기를 세우고 원침에 배알하여 반달처럼 휘어져

    사방에 위엄을 떨치니 활터에 표후(豹帿)를 맞대었구나,

    이에 날아갈 듯한 화려한 집을 지어 중곡(中鵠)한다는 좋은 이름을 지었구나하였다.

    그러므로 득중(得中)’이란 이름은 문무겸비(文武兼備)의 국왕이 되고자 하였던

    정조의 심회를 스스로 표출한 것이라 하겠다.

    원래 낙남헌 자리에 있었으나 1794(정조 18)에 옮겨지어서

    북향으로 노래당과 이어져 잇으며 앞마당에 어사대(御射臺)가 있다.

    득중정 남족에 위치한 득한문(得閒門)은 봉수당 서행각과 서로 이어져 있다.

    득중정에서는 건물을 옮기기 전인 1790년에 정조가 친림(親臨)하여 편액을 쓴 후

    광주와 과천 등 연로(輦路)에 거처하는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를 대상으로

    별시(別試)를 치러 문과 5인과 무과 175인을 선발하였던 바 있으며,

    1792(정조 16) 원행시에도 정조는 수원의 유생과 무사들을 시험 보아 선발하였다.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는 주간과 야간에 활쏘기를 하였는데

    김홍도가 그린 정조대왕 수원능행도(正祖大王 水原陵行圖)“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가 남아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 야간 활쏘기 행사의 모습과 활쏘기가 끝난 후에 실시한

     매화시방(埋火試放:불꽃놀이)‘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화서문(華西門) 앞까지 인파가 모여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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