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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행궁 낙남헌(華城行宮 洛南軒)
    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13. 12. 10. 04:30

    화성행궁 낙남헌(華城行宮 洛南軒)

     

    조선 정조18년(1794년)∼20년(1796년) 사이에 수원화성 성곽을 축성하고 팔달산 동편에 화성행궁을 건립하고,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선왕의 원침에 자주 전배하고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낙남헌은 정당은 7량 14.5칸의 규모로, 기단은 벽돌을 돌을 섞어 쌓았으며, 후면의 퇴칸에는 분합문에 난간을 설치했다.

    구 건물인 장춘각(藏春閣) 5칸, 신축한 노래당 외 29.5칸을 포함해 전체 규모는 49칸을 갖췄다.

    낙남헌 북쪽 가까이의 11칸은 별무사(別武士)와 수첩군관들이 임시로 숙직하게 하는 곳이다.

    낙남헌으로 오르는 계단 양 끝에는 구름과 태극문양의 조각된 운대성이 있다.

    ‘낙남헌’이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도읍(都邑)인 낙양성(洛陽城) 남궁(南宮)에서 따왔다.

     낙(洛) 자는 곧 ‘낙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왕망(王莽)의 난으로

    피폐해진 도읍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遷都)하고 정궁(正宮)을 ‘남궁’이라 했던 것이다.

    정조는 세자가 15세 되는 1804년에 양위하고 칠순이 된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으로 내려갈 구상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후 사정은 다르지만 광무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사실과 유사한 점이다.

    또, 낙남헌 상량문에는 “...주나라 고을의 이름을 빌어 지었고 한나라 궁전에서 뜻을 땄구나...

    순조롭게 이뤄진 임금의 계획은 한 고조의 옛일을 본떴고,

    호화로운 현대판에는 낙남이라는 좋은  이름을 써 붙였구나...”해 그와 같은 유래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낙남헌은 화성으로 내려가 노후를 보내고자 해 화성행궁을 건설한 정조의 의도를 잘 드러낸 건물이다.
    원래 낙남헌 건물은 득중정을 노래당 옆으로 옮겨 짓고 득중정이 있던 그 터를 넓혀서 신축했으며, 1794년(정조 18)에 완공됐다.
    건물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했으며, 기단을 벽돌과 돌을 섞어 쌓았고,

     동·서·남 3면으로 분합을 달아 행사가 있을 때는 분합문을 활짝 열어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낙남헌은 행사를 위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그 앞은 넓은 마당을 만들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동북쪽의 작은 연못은 1789년 조성된 득중정지(得中亭池)로 그 가운데에 작은 섬을 두는 등 조경을 설치했다.
    1795년(정조 19) 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낙남헌에서 치러졌으며,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군사들에 대환 호궤(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를 낙남헌에서 거행했다.

    수원향교의 문선왕묘(文宣王廟)를 배알한 뒤 낙남헌에서 별시(別試)를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고,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주는 행사인 방방(放榜)도 이곳에서 진행됐다.

    또, 정조는 낙남헌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養老宴)을 시행했다.

    낙남헌에서의 양로 잔치는 혜경궁의 회갑연인 만큼 당년 61세인 수원부의 백성은 모두 참여토록 했으며,

    문관·음직·무관 및 본부 경내에 있는 조관(朝官)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을 참여 대상으로 크게 확대했다.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1720~1799)이 양로연을 축하하는 악장 ‘화일곡(化日曲)’을 지어 올렸으며,

     정조는 혜경궁의 만만년을 축수(祝壽)하는 시를 짓고 참가자 모두 화답하는 시를 써서 제출하게 했다.
    양로연에 참석한 사람은 임금을 호위하고 내려온 노인 15명과 화성노인(華城老人) 384명이었고,

    이들에게는 비단 1필(匹)씩 하사했으며, 당시 양로연의 모습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기록과 ‘양로연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1797년(정조 21) 8월 18일에는 이곳에서 화성유수부의 무사를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치러 상을 차등에 따라 주기도 했다.

    낙남헌 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으며, 상량문은 정조 20년 11월 이조판서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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