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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華城行宮)의 '신풍루(新豊樓)'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13. 11. 13. 05:00
화성행궁(華城行宮)의 '신풍루(新豊樓)'
화성행궁(華城行宮)의 정문으로 세운 신풍루(新豊樓)는 정조13년(1789)에 지은 누문(樓門)으로,
처음에는 조심태가 편액(扁額)을 써서 진남루(鎭南樓)라 하였다.
6칸 규모에 2층 구조로, 위층은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는 3개의 널문을 설치하였는데,
누마루에서 수원 읍내에 늘어선 집들을 내려다 보고 그 앞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니,
서울의 남쪽에서 삼남(三南)을 제어하는 웅부(雄府)라는 뜻에서 진남루(鎭南樓)라고 한 것이다.
정조18년(1794년) 가을에 행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할 때에는,
누대(樓臺) 좌우에 남북군영(南北軍營)을 설치함과 더불어 누문 좌우로 행각을 늘려 짓고,
단청(丹靑)을 다시 칠하여 산뜻하게 하며, 누문 밖 어도(御道) 왼쪽에 두어
임금이 행차할 때 말을 타고 들어와 내리는 장소로 쓰이던 마랑(馬廊)을 고쳐 짓는 등,
행궁의 정문을 새로운 행궁에 어울리도록 버젓하게 하였다.
이에 정조19년(1795), 다시 편액을 쓰게 하여 신풍루(新豊樓)라 하고,
누문 앞으로 길이 114척, 넓이 35척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신풍교(新豊橋)라 이름하였다.
정조는 중국 한(漢)나라가 나라를 시작한 풍패(豊沛)의 이름을 따와
신풍(新豊)이라는 이름을 지음으로써 화성행궁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또한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패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풍(豊)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를 생각해 볼 때,
정조가 화성을 고향과 같은 고장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이러한 편액을 내린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정조19년(1795) 을묘년(乙卯年) 원행(園幸) 때에는 정조가 친히 참석한 가운데
신풍루 앞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때의 행사 모습은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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