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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한 밤에, "화성행궁 봉수당(華城行宮 奉壽堂)"에서
    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13. 11. 8. 05:30

    야한 밤에 "화성행궁 봉수당(華城行宮 奉壽堂)"에서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華城行宮)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유수(華城留守)의 동헌(東軒)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89(정조 13) 가을에 신읍치의 부아(副衙)로 건립되어,

    정조 18~20년에 북각도(北閣道) 48칸을 증축, 전체 규모 112칸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 건물에는 어서(御書)장남헌(壯南軒)“이라고 편액 했으나,

    정조 19년 윤2월 원행(園幸) 때 생모 혜경궁 홍씨의 회갑(回甲) 진찬례(進饌禮)를 이곳에서 베풀고

    새로이 봉수당(奉壽堂)‘이라고 편액하였다.

    편액은 전 참판인 송하옹 조윤형(松下翁 曺允亨, 1725~1799)이 썼으며,

    상량문은 정조 2011월 판중추부사 정수재 이병모(靜修齋 李秉模, 1742~1806)가 지었다.

    평상시에는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가 이곳에 집무한다.

    정당의 규모는 721칸이고 사방으로 행각과 여러 출입문이 나있다.

    정면으로 3문 형식의 중양문(中陽門), 좌익문(左翊門)이 있고, 남쪽에 경선문(慶善門),

    북쪽에 어천문(於千門)과 유억문(維億門), 건장문(建章門), 서쪽에 중영문(重英門)이 세워져 있다.

    1795(정조 19) 정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회갑연을 맞아 존호(尊號)를 올리고,

    혜경궁의 회갑연(回甲宴)을 미리 앞당겨 윤213일 원행시에 회갑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악장(樂章)과 자신의 마음을 읊은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만년(萬年)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조윤형(曺允亨)으로 하여금 현판에 쓰게 하였다.

    상량문은 이병모가 지었는데, 어머님의 연세 회갑에 올랐으니 오래살기를 바라는 임금님 생각 더욱 간절하네라고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정조 13) 819일 상량하고 925일 완공되었다.

    17902월 원행시에는 정조는 장남헌이라고 직접 써서 편액을 달았으며, 그 후 1794(정조 18)에 증축하였다.

    봉수당 서쪽 치마는 장락당 처마와 서로 겹쳐져 있고, 남쪽 퇴는 바로 경룡관 북행각으로 통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실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에는 건물에 거북무늬의 발이 쳐져 있고,

    건물 앞으로 여러 악공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각종 춤이 공연되고 있으며

    주변에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둘러앉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는 진찬례를 마치고 전교하여 몇 년 전부터 축수(祝壽)를 기도해왔는데 오늘에서야 진찬례를 올리게 되었다.

    천기(天氣)가 청화(淸和)하고 어머님의 건강이 강녕(康寧)하시니 기쁘고 경사스럽기 그지없소라고 하며 9년 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칠십수연 진찬(七十壽宴 進饌)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당시의 커다란 화젯거리로 행사에는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날의 성대한 잔치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이희평의 화성일기(華城日記)” 등 많은 자료에 의해 그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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