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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금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쉬어가던 처소, ‘화성행궁(華城行宮)’
    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13. 6. 3. 07:20

    임금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쉬어가던 처소,

    ‘화성행궁(華城行宮)’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에 위치한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정조 20년(1796)에 수원화성(水原華城)을 쌓은 뒤

     

    팔달산(八達山) 동쪽기슭에 세운 행궁(行宮: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으로

     

    정조대왕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후에 장조로 추존)의 능인

     

    화산릉(花山陵)에 참배(參拜)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가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府使, 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대왕은 정조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顯隆園) 천봉(薦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華城行宮)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昇遐)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곁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奉安)하였는데,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건물을 헐어 낸 것을 1994년부터 복원사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양문(中陽門)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東軒)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장락당(長樂堂)은 1795년 을묘원행 중 혜경궁의 침전(寢殿)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낙남헌(洛南軒)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관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노래당(老來堂)은 늙은 뒤에 돌아오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얽힌 건물이다.

    다른 행궁은 150~180칸이지만 화성 행궁은 567칸이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은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백거이(당나라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가 장차 화성에 내려와

    혜경궁을 극진히 모시겠다는 뜻을 잘 표현하였던 것이다.

     

     

     

     

     

    비장청(裨將廳)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비장(裨將)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1790년(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新豊)'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賑恤)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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