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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주초(迎恩門 柱礎)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3. 12. 25. 04:46
영은문 주초(迎恩門 柱礎)
영은문 주초(迎恩門 柱礎)는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慕華館) 앞에 있던 일각문(一脚門)의 주춧돌이다.
1896년(건양 원년)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裁弼; 1866~1951)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자주독립의 결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은문을 헐어낸 후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을 세우게 되자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건물인 모화루(慕華樓)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07년(태종 7)이고,
1430년(세종 12)에는 모화관으로 개칭하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1536년(중종 31)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건의로 격이 낮은 홍살문을 헐고,
청기와를 얹은 영조문(迎詔門)을 세운 것이 영은문의 전신이다.
1539년(중종 34)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설정총(薛廷寵)이 이르기를
‘사신이 올 때에는 문서나 선물 등을 가지고 온다.
그러므로 다만 영조(迎詔)라 하는 것은 그 뜻이 한쪽에 치우치니 타당한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하고,
‘迎恩門(영은문)’이란 이름을 써서 걸도록 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온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문의 편액을 다시 썼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영은문은 두 개의 기둥을 세운 1칸 규모로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철거되기 전의 모습인 1890년의 사진 자료에 따르면 문은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걸고 평방 위에는 6구의 다포작(多包作)을 배열했다.
겹처마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용마루는 회를 높이 바른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양끝에 취두(鷲頭), 추녀마루에는 잡상(雜象)을 얹었다.
양 기둥 사이에는 낙양(落陽)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는 풍혈이 새겨진 인방재가 있고,
중앙에 ‘迎恩門(영은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주춧돌은 화강석으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받침돌)과 대석(臺石)
그리고 사각형의 높은 주춧돌로 구분하여 깎았고,
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 눈 모양의 장식)이 좌우로 2개씩 새겨져 있다.
이 위에 민흘림을 가진 긴 주춧돌이 사방의 모를 약간씩 죽여 모각되어 있다.
주춧돌 윗면에는 목조 가구(木造架構)를 고정시켰던 홈이 패어있고,
또 상부 언저리에는 철띠를 돌려 주춧돌의 파손을 방지하였다.
•이야기; 영은문 주초는 1896년(고종 33) 독립문 공사 때 그 앞에 있었으나
1934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1979년에 다시 이 앞을 가로지르는 성산대로가 개설되면서 독립문과 함께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방으로 약 70m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영은문 주초(迎恩門 柱礎)1963년 1월21일 사적 제3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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