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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왕실문화의 전당, 서울 운현궁(雲峴宮)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4. 5. 23. 05:26

    우리나라 왕실문화의 전당, 서울 운현궁(雲峴宮)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高宗)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로서

    생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했다.

    서운관(書雲觀)이 있던 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을 따서 운현궁(雲峴宮)이라 불렸다.

    1864(고종 1)에 노안당(老安堂)과 노락당(老樂堂)을 짓고,

    1869(고종 6)에는 이로당(二老堂)과 영로당(永老堂,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9)을 세웠다.

    창덕궁(昌德宮)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敬覲門)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恭覲門)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1912년에는 양관을 세워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別堂)으로 쓰였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으로 볼 때, 사대부 집이라기 보다는 궁궐 내전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인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을 거쳐

    손자 이준용(李俊鎔, 1870~1917)에게 상속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집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0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19771122일 사적 제257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운현궁 서울 운현궁)으로 명칭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수직사(守直舍)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노안당(老安堂)

     

    운현궁(雲峴宮)의 사랑채로 정면6,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遮陽)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거처한 곳으로 고종(高宗) 즉위 후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527일 보수 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노안당(老安堂)"이란 이름은 공자가 "노자(老者)를 안지하며"라고 한 "논어(論語)"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대원군(大院君)의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의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治國)의 이념을 갖고 있다.

     

     

     

     

     

     

     

    노락당(老樂堂)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 측면 3칸 규모이다.

    1866(고종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嘉禮)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문양(불발기창호)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붕이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龍紋樣)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나타낸 표현이다.

     

     

     

     

     

     

     

     

     

     

    이로당(二老堂)

     

    이로당(二老堂)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 1869(고종6)에 새로운 안채로

    이로당을 짓게 되었는데 정면이 8, 측면이 7칸으로 되어 있다.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 수 있게 별도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철저한 금남지역(禁男地域)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음()자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이로당의 안주인은 운현궁 천체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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