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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 우탁선생기적비(易東 禹倬先生紀蹟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4. 8. 5. 05:00
역동 우탁선생기적비(易東 禹倬先生紀蹟碑)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
1263(원종 4), 1262(?)~1342(충혜왕 복위 3). 고려 후기의 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천규(天珪)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했을 때
영해지방의 사람들이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섬기는 등 폐해가 심하자 신사(神祠)를 철폐했다.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극간했다.
그뒤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인 예안에서 학문에 전념했으나 충숙왕이 여러 차례 부르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성균제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했다.
우탁은 합리적이고 사변적인 학자로서 당시 불교나 도가(道家)에 비해
사변이 약했던 유학의 학술과 학문적 기본소양을 갖추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정주학(程朱學)이 전래되었는데,
특히 정이(程頤)가 주석한 주역(周易)의 정전(程傳)을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후학들이 그를 종사(宗師)로 삼았다 한다. 유작으로 시조 2수가 전한다.
예안 역동서원(易東書院), 안동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물어 간데없다.
적은 덧 빌어다가 머리위에 불리고저
귀 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출전 :樂學拾零 靑丘永言(易東禹倬)
한손에 가시 들고 또 한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드니
백발이 제 먼저 지름길로 오더라
출전 : 樂學拾零 海東歌謠(易東禹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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