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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현존하는 다블뤼주교관 - 천주교 신리성지(天主敎 新里聖地)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4. 9. 18. 05:57
다블뤼 주교관(Saint Bishop Daveluy Residence),
- 천주교 신리성지(天主敎 新里聖地) -
이 집은 제5대 조선교구장 성 다블뤼 주교의 비밀 성당이며 주교관이었다.
병인박해(186년)로 다블뤼 주교가 순교하고 신리 교우촌이 파괴되면서 이 집도 주인을 잃었다.
이후 1927년 이 지역 교우들은 모금을 통해 이 집을 매수하여 천주교회에 헌납하였다.
대들보에는 '가경 21년 병자년 2월 18일 진시 상량(嘉慶 二十一年 丙子年 二月 十八日 辰時 上樑)'이라고 적혀 있다.
가경 21년은 서기 1816년으로, 이 집은 200년 가까이 신리의 신앙과 순교자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1954년과 1964년에 축성과 수리를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004년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또한 이 집은 성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이기도 하다.
안주교의 체포 이후에 덕산 포교에게 끌려간 손자선은 자신의 살을 물어뜯으며 신앙을 증거 했다.
이후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뒤에 고향인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현재 성인의 묘는 대전리 공동묘지 (무명순교자들의 묘)에 안장되어 있다.
손자선 토마스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 천주교 신리성지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1817-1866)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 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너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 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 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순교복자기념비(殉敎福者記念碑)
유일하게 현존하는 주교관
조선 제 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의 은거지였던 이 집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박해기 주교관이다.
이러한 가치를 알고 있던 지역의 교우들이 1927년 이 집을 매수하여 봉헌하였다.
1954년과 1964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강당의 형태로 보존되어 오다가 200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되었다.
대들보와 서까래 일부 그리고 주춧돌, 기둥 등은 집이 처음 지어질 당시의 재료들이다.
부엌 안에서 보이는 대들보에는 '가경 21년 병자년 2월 18일 진시 상량'이라고 적혀 있다.
가경 21년은 서기 1816년으로, 이 집은 200년 가까이 신리의 신앙과 순교자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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