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사명대사 동상(四溟大師 銅像)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4. 9. 26. 04:30

    사명대사 동상(四溟大師 銅像)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1544~1610)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서 풍천 임씨(豊川任氏)이며

    속명은 응규(應奎)이고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이고 별호는 종봉(鍾峯)이며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수성(守成)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사략(史略)을 배웠으며,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웠다.

    1558(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에게서 전등록(傳燈錄)을 배웠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많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는데,

    특히 20세 연상인 박순(朴淳)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자주 토론하며 가까이 지냈다.

    또 당시 재상이던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老子).장자(莊子),

    문자(文子),열자(列子) 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 宗首寺刹)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 : 西山大師 1520~1604)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八公山금강산(金剛山청량산(淸凉山태백산(太白山)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오도(悟道)하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 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강원도 건봉사에서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 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 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 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 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 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적진에 들어가 담판할 때,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조선에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고 묻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알고 모두 노리고 있다.”고 한

    대사의 일화는 대사의 용맹성을 잘 대변해 주고있다.

    국방에 있어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 (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南漢山城)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 (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 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 000 여명의 포로를 데리고 16054월에 귀국하면서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치아 진신사리 5과를 되찾아와

    금강산 발원지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 홍제암에서 요양하다가 16108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는데 일제 강점기때

    비문에 반감한 일인(日人)들에 의해 비를 파괴하여 네동강 난것을 보수하여 현재 세워두고있다.

    사명대사의 발자취는,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있는 사명대사의 생가지(경남기념물 제116)

    국난의 변고시 땀을 흘린다는 밀양 무안의 표충비각의 비석,밀양 표충사,

    강원도 승병의 발원지 건봉사,입적한 해인사 홍제암등이있다.

    저서로는 문집인<사명당대사집>7권과<분충서난록(奮忠難錄)>1권 등이 있다.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 =

     

     

     

     

     

     

     

     

     

     

    덕산 이한상(德山 李漢相) 헌납(獻納)

    애국선영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 서울신문사 건립(建立)

    1968年 5月 11日

    표제(表題): 무시 신경희(無始 申卿熙)

    명문(銘文):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송영수(宋榮洙)

     

     

    2156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