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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허 이태준문학비(尙虛 李泰俊文學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4. 9. 13. 05:30

    상허 이태준문학비(尙虛 李泰俊文學碑)

     

     

    상허 이태준(1904.1.7.~?)190411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보통학교 교관과 주사를 지낸 지식층 집안 아들로 태어났다.

    개화당에서 일한 아버지는 나라를 개혁하려다 실패하자 가족을 이끌고 러시아로 망명한 아버지를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갔으나 이태준이 다섯 살 나던 무렵에 화병으로 죽는다.

    얼마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고아가 된 이태준은 누이 둘과 함께 철원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자랐다.

    선생은 그때부터 친척집 어른들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하기도 한다.

    1920년 이태준은 배재학당 입학시험에 합격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다니지 못한다.

    선생은 그때부터 청년회관 야학교 고등과에 다니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하다가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한다.

    선생은 교내 청소를 맡아 학비를 면제받거나 책장사로 수업료를 벌이는 피곤한 생활 속에서도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톨스토이, 괴테, 위고 등 문학작품에 빠진다.

    1924년에는 학예지 <휘문> 학예부장을 맡으면서 기행문 부여행

    감상문 바람에 불려 백월(白月)을 알고’, ‘억울한 노릇등을 발표한다.

     

    4학년 때는 학내 시위 주모자로 찍혀 학교를 그만 두고, 192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간다.

    선생은 이듬해 봄까지 하숙집에 들어앉아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쓴다.

    선생은 이 작품을 <조선문단>에 투고해 입선하지만 이상하게도

    <조선문단>에는 나오지 않고 <시대일보> 1925713일자에 실리면서 문단에 나온다.

    그 뒤 조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들어간 선생은 신문배달 등으로

    학비를 벌며 고학하다가 궁핍과 고독감을 이기지 못하고 16개월 만인 192711월에 자퇴하고 만다.

    귀국 뒤인 1929년에는 <개벽사>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학생><신생> 편집을 맡게 된 선생은

     누이’, ‘온실 화초’, ‘석양’, ‘그림자’, ‘불도 나지 않았소등 어린이 소설과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30년 결혼을 한 이듬해 <중외일보>로 일터를 옮긴 뒤

    <중외일보> 후신인 <조선중앙일보>에서 학예부장으로 일하면서 1932년부터 이화전문학교,

    이화보건전문학교, 경성보건전문학교에 출강하며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누린다.

    이때부터 <삼천리><동방평론> 같은 잡지에 불우(不遇) 선생’,

    고향’, ‘어떤 날 새벽’, ‘실락원 이야기등을 발표한다.

    1933년에는 이효석,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에 들어간다.

    선생은 저널리즘과의 타협이 없이, 비교적 순수하게 나대로 쓰고 싶다는

    스스로 바람이 있어 장편보다 단편에 힘을 기울인다.

    같은 해 <중앙>에 발표한 달밤에서는 보조가 아닌 원배달원

    평생소원인 천치를 통해 현대인들이 지닌 이기심을 파헤친다.

     ‘꽃나무를 심어놓고에서는 문명과 이기심에 무너지는 고향 땅에 대한 애착과 향수를 담아낸다.

    같은 해 <신동아>아담의 후예’, 1934년에는 <개벽>어둠’,

    1935년에는 <조광>색시’, <신동아>손거부’,

    1936년에는 <조광>까마귀’, ‘복덕방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복덕방은 이태준 선생이 즐겨 쓰던 노인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선생은 1939<문장>에 발표한 영월 영감에서도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1940년에는 <문장>에 친일 색채가 짙은 토끼 이야기

    지원병 훈련소의 1을 싣는 등 일본어로 된 많은 글을 내놓는다.

    선생은 조선문인협회황군위문작가단같은 친일단체 활동에 협력해

    1942년 일제가 주는 조선예술상을 받기도 한다.

    1943년에는 <인문사>에서 <대동아전기>를 펴내고,

    같은 해 6왕자 호동을 발표한 뒤 절필하면서, 해방 앞까지 고향 철원에 칩거한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1946)에서 이러한 문학적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앞에 든 것 외에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해방전후등이 있으며, 문장론문장강화(文章講話)가 있다.

    월북 이후에는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아는 바가 없다.

    다만 1969년경에 강원도 장동 탄광에 이태준 부부가 살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긴 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남한에서는 1988년 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이 발표되어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이태준 문학전집도 발간되었다.

    그러나 조국과 고향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이 위대한 문학자의 발자취는 지금도 묘연하다.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져서 이 고독한 경계인의 문학과 생애가 우리 모두에게 알려지길 바랄 뿐이다.

    이태준 선생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많은 연구대상이며 이태준을 연구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가장많은 작가이다.

    또한 거의 유일하게 그의 호를 딴 상허학회라는 교수들 중심의 모임이 운영되고 있을만큼 우리 문학사에 토대가 되는 사람이다.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 두루미평화관 앞 이태준 문학비

     

    문학비의 글씨는 철원출신의 서예가 윤석 한철주(允碩 韓喆柱, 초대 만해대전 대상작가, 전 철원서예협회회장)선생이 쓴 것이다.

     

    상허 이태준 선생의 흉상

    이 흉상의 몸 반쪽이 없는 것은 아직 우리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더불어 이태준 선생에 대한 완전한 생애를 조명하지 못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내 고향은 철원도 아니요, 배기니도 아니요, 서울도 아니다.

    부산부두에 발을 올려 딛는 때부터 내 고향이다.

     

    상허 이태준문학비 후면에 새겨진 단편소설 `고향에서' 중 한 귀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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