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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지내던 마을 "은이 성지(隱里 聖地,隱里 聖址)"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4. 10. 20. 04:52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지내던 마을,

    "은이 성지(隱里 聖地,隱里 聖址)"

     

    은이 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게 되면서 시작된 교우촌으로서,

    은이(隱里)란 글자 그대로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 공소는 1836년 1월 13일, 프랑스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 신부가,

    그 해 4월경 이곳을 방문하여 당시 16세인 소년 김대건(金大建, 1821~1846)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이곳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또한 김대건 소년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던 장소는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15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안드레아)는 7월11일 서울 모방 신부 댁에 도착,

    이미 선발된 동료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과 함께

    라틴어를 배우다가 12월 3일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8년 뒤인 1944년 12월 초에 최양업과 함께 만주(중국 長春)의 소팔가자(小八家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았고,

    이듬 해 8월 17일에는 상해(上海) 인근의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는 1845년 10월 12일 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신부를 모시고

    강경 황산포를 통해 귀국하여 11월경부터 1846년 부활대축일까지 약 6개월동안

    은이 공소에서 기거하면서 서울과 용인 일대 교우들을 사목하였다.

    그러므로 은이 공소는 사실상 김대건 신부 본당 역할을 한 곳이며. 그의 땀과 신앙이 배어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고(高) 주교의 명에 따라 최양업 부제와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위한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1846년 4월 13일 은이 공소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길을 떠나며,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홀로 남으신 내 불쌍한 어머니를 여러 교우분들이 잘 돌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라고

    마지막 인사 겸 부탁을 하고 길을 떠났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6월 5일 순위도(巡威島, 황해남도 강령군)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개월간 40여 차례의 혹독한 고초를 겪은 후,

    같은 해 9월 16일, 그 학덕(學德), 그 웅지(雄志)를 미쳐 펼쳐보지도 못한 채,

    26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장렬히 순교하였다.

    그가 순교한 후 40여일 만에 이민식(빈첸시오)과 여러 교우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몰래 찾아내어, 낮에는 산에 숨고 밤으로 운반하여 미리내 성지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미리내 성지까지 가는 길에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이 고개는 김대건 신부 생전에는 그가 걸어서 넘나들던 사목활동 행로였고,

    순교 후에는 그의 유해가 옮겨진 경로가 되어,

    옛부터 교우들은 이 고개를 신덕 고개(은이 고개), 망덕 고개(해실이 고개), 애덕 고개(오두재 고개)라고 부르며,

    도보 순례를 하면서 그의 고귀한 순교 신앙 정신을 기려 오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25일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1998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2주년 기념일에 천주교 은이성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632-1 =

     

     

    은이에서 마지막 미사 집전후 남기신 말씀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홀로 남으신 내 불쌍한 어머니를 여러 교우분들이 잘 돌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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