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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려지지 않은 작은성지 "천주교 이천 단내성지"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5. 2. 3. 05:00

    알려지지 않은 작은성지 "천주교 이천 단내성지"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로를 따라 조성된 오솔길을 따라 들어오면 오래된 수도원 같은 느낌의 성지가 나타난다.

    앞으로는 수량이 풍부한 시냇물(복하천)이 흐르고 뒤로는 울창한 숲의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성가정 성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성지이다.

    성가정 성지에는 숲이 울창하면서도 인적이 없는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총연장 5.2km의 순례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예수성심상이 있는 전망 좋은 와룡산 정상에서는 이문우 성인의 고향과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 활동 경로를 조망할 수 있으며,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박해받는 신자들의 은신처였던 검은바위와 굴바위에서는

    박해를 피해 숨어살았던 신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정은 바오로의 시신이 안장된 곳이다.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순교자 정은과 그 가족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기리기 위해 이곳을 개발하고

    1987년 9월 15일에 수원교구장 김남수(안젤로) 주교님의 집전으로 축성 하였다.

     

    =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1리 357번지 =

     

     

     

     

     

     

     


    오위성인순교비(五位聖人殉敎碑)

     

    이문우(요한), 이호영(베드로), 이소사(아가다), 조증이(바르바라), 남이관(세바스티아노)


     

     


    성가정 성지

     

    성가정 성지에서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들이다.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는 할아버지와 종손자 사이이고, 김대건 신부님도 부자가 함께 순교성인이며,

    이호영 성인과 이 아가다 성녀는 남매간이고, 조증이 성녀와 남이관 성인은 부부 사이이다.

    이문우 성인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극진했던 성인이다. 순교는 바로 성덕의 절정이다.

    그러기에 이 가족 순교자들은 가족이 함께 성덕의 정상에 도달함으로써, 가정 성화의 귀감을 보여준 분들이다.

    또한, 이 순교자들은 마지막 순교의 길을 가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자 함으로써,

    지극한 부부 사랑과 부모 사랑과 자식 사랑을 보여준 분들이다.

    래서 성가정 성지는 이 같은 순교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가정 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성가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가 되었다.

    오늘날 모든 교우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는 바로 가정문제이다.

    그리고 가정문제의 핵심은 사랑의 결핍에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가정의 불행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형제들 사이에 사랑이 결핍될 때 그 가정은 불행해지게 된다.

    가족들 사이에 무너진 사랑을 재건하는 것이 가정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그래서 성가정 성지는 가정 안에 무너진 사랑을 재건하는 순례지,

    가정 안에 일치와 평화와 행복을 재건하는 순례지로 기능하고자 한다.


     

     

     

     

     

     

     

     

     

     

     

     

     

     

     

     

     

     

     

     


    정은 바오로(1804~1866)와 정양묵 베드로(1820~1866)

     

    정은 바오로는 신유박해가 끝난지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났다.

    천주교 신자였던 사촌형(이기양, 정섭, 정옥)들이 유배되거나 사망한 터였으므로 그들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지는 못하였다.

    성장한 뒤 자신의 등창을 치료해 주던 조사옥이라는 의원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그가 입교한 뒤 모친인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도 모두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정은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생활하던 중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 신자로 고발되었고 음력 11월 13일 집으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잡히게 된다.

    정은 바오로는 “잡혔으면 가야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겠는가.”하시며 태연히 떠났다고 한다.

    정은 바오로가 잡혀가자 재종손인 정양묵 베드로도 “나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대부(代父)를 따라 치명하러 왔으니 나도 죽여주시오.” 하며 스스로 광주 영문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음력 12월 8일 여러 교우와 함께 백지사(白紙死: 죄인의 손을 뒤로 묵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서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붙여 숨이 막히게 하여 죽이는 것이다.

    당시 천주교인을 처형하는 데에는 주로 매로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 칼로 목을 베 죽이는 참형(斬刑),

    목을 매 죽이는 교수형(絞首刑) 등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에는 너무 많은 천주교인을 잡아 죽이게 되므로,

    포졸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진저리를 내게 되어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발라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가 유행하였었다. 곧, 사람을 죽이는데 염증을 느낀 포청의 형졸들이 피를 보지 않고

    사람을 쉽게 죽이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백지사였던 것이다.)로 순교한다.

    이렇게 순교한 교우들의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東門) 밖 개울가에 버렸는데,

    수십일 혹은 수개월 동안 버려져 있었기에 많이 상한 시체도 있었다고 한다.

    정은 바오로가 광주 영문에 잡혀가자마자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고

    포졸들은 남아있는 식구를 잡으려고 날마다 찾아왔다.

    결국, 남은 식구들은 눈 덮인 산으로 피신해, ‘검은바위’나 ‘옥시울 양지골’,

    그리고 기록에는 안 나오지만 후손들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장소인 ‘굴바위’에서 은신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년놈들을 내쫓든지 아니면 모두 잡혀가 몰살을 하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동네가 시끄러워서 살 수 있나. 그 년놈들을 집에다 숨겨주고 밥을 주는 놈이 누구냐?

    그놈부터 내쫓아야겠다.”라고 악담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 정은 바오로가 치명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 일동 방지거와

    수동 필립보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버려진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달라고 매부 박서방의 8촌 박선여에게 부탁을 한다.

    생사(生死)가 왔다갔다하는 일이기에 고민 끝에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박선여는 낮에 동문 밖으로 간다.

    그리고 낭떠러지 바위 밑에 굴러 떨어져있는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풀을 베어 덮고 큰 돌로 표시를 해 둔다.

    밤이 되어 아들 둘은 낮에 표시해둔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들쳐메고 이곳 단내에 와 산소에 모셨다.

    이후 남은 가족들은 고향 단내를 떠나 30여 년을 산속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00년이 되어서야 다시 고향 단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함께 치명하셨던 정양묵 베드로는 그 시신을 찾지 못해 후에 성지를 조성하면서

    남한산성 동문 밖 흙을 거둬 정은 바오로 산소 옆에 모셨다.

    성가정 성지에는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 묘소와 정은 바오로 가족들이 숨어지내던 ‘검은바위’,

    ‘옥시울 양지골’, ‘굴바위’가 그대로 남아있어 순례길을 따라

    과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피신처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교우촌

     

    이천 지역의 천주교는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이 이존창과 함께 권철신의 문하생이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이 그 제자들과 함께 강학회를 여는데 여기에 이총억이 참석하였다.

    이기양은 이익의 제자이자 초기의 천주교 신자였던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친밀한 사이였는데,

    45세 때인 1788년부터는 외가가 있던 이곳 단내에 와서 살았다.

    이기양의 외사촌이며 정은의 사촌 형인 정섭은 1785년에 명례방(지금의 명동) 사건이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된 후

    동료와 함께 형조를 찾아가서 성성과 교회 서적을 돌려달라고 항의했던 유명한 분이다.

    이후 정섭은 윤유일(바오로) 등과 교류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종형 정옥 또한 이 박해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났으나,

    매를 심하게 맞은 탓에 집으로 돌아오던 중 길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단내는 한국 교회 창건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신앙으로 고수해 온 참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한국교회 창건기의 교우촌을 찾아가 보면, 초기 신자들의 후손은 대부분 배교하고,

    그 마을은 신자 한 사람 없는 외교인촌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단내는 그렇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면면하게 신앙을 이어 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단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한 표본적인 구교우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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