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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을 상징하는 관광명소, 반달 꼬리처럼 휘어져 있다는 월미도(月尾島)
    국내 나들이/섬(島)으로 2015. 1. 28. 05:00

    인천을 상징하는 관광명소,

    반달 꼬리처럼 휘어져 있다는 월미도(月尾島)

     

    인천시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약 1km 거리에 있으며,

    남쪽에 있는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 내항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

    섬의 모양이 남북으로 긴 삼각형 을 이루고 있어 반달의 꼬리처럼 휘어져 있다고 하여 월미도라고 한다.

    1883년 인천 개항을 전후해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말기에는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 대장의 이름을 따서 외국 지도에 장미섬(Rose Island)이라는 명칭으로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사기지로 사용되었고,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중요시되면서 미군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1962년에 석축제방으로 매립되면서 해안도로를 건설해 인천의 관광 코스가 되었다.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인천항 방파제 주변의 여러 시설물을 정비하면서

    시민의 휴식처와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너비 20m, 길이 0.8km의 해안도로를 따라 만남의 장, 교환의 장, 문화·예술의 장, 풍물의 장 등 4구간이 있고,

    이 거리의 해안도로변에는 각종 카페와 횟집이 줄지어 있다.

    또한 바다 주변을 순회할 수 있는 유람선이 있고, 서해의 낙조를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 각종 오락시설과 해수욕장·호텔 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

    인천시민을 비롯한 수도권 시민의 1일관광지로 애용된다.

    면적 0.7㎢. 섬의 최고지점은 해발 108m이다.

     

     

     

     

     

     

     

     

     

     

     

     

     

     

     

     

     

     

     

     

     

     

     

     

     

     

     

     

     

     

     

     

     

     

     

     

     

     

     

     

     

     

     

     

     

     

     

     

     

     

     

     

     

     

     

     

     

     

     

     

     

    월미도(月尾島)의 역사(歷史)

     

    인천을 상징하는 가장 이름난 명소를 꼽으라면 월미도(月尾島)를 들 수 있다.

    자유공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수문식 독이 있는 인천 내항 오른편에 울창한 숲으로 덮힌 작은 섬이 바로 월미도이다.

    한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관광지로서

    또 근대 100여 년 한국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뚝 솟은 이 섬은 말 그대로 인천의 상징이다.

    월미도가 한국사의 중심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프랑스, 미국 함대가 닻을 내리고,

    그 뒤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가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영종진(永宗鎭)을 포격하면서 부터였다.

    구미(歐美) 열강이나 일본이 서울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그 한강 하구에 서울의 길잡이처럼 서 있는 월미도를 기점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월미도 산 중턱에 순환도로를 뚫고 도로변에는 벚나무,

    산에는 소나무를 심어 섬 전체를 가꾸어 1918년에는 풍치지구로 지정하기도 했다.

    1918년 인천 내항에 독을 건설하면서 한강으로부터 흘러드는 급한 물살을 막고

    아울러 월미도까지 나룻배에 의존해야만 했던 교통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북성지구(현 대한제분 앞)로부터 약 1km에 달하는 2차선 둑길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총 둘레 4km 정도의 이 작은 섬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둑길이 놓인 후

    철도국이 소형 해수 풀과 해수를 데운 이른바 공동목욕탕식 조탕(潮湯)을 만들고 이곳을 임해유원지로 개발한 후부터였다.

    당시 알려진 휴양소로서 원산의 송도원, 부산의 해운대를 제치고 월미도는 단연 전국 최고의 명소로 이름을 날렸는데

    봄에는 월미도 중턱을 지나는 순환도로에 만발한 벚꽃놀이로 붐볐고,

    여름에는 해변가 수영장에 헤엄치는 인파가 들끓었다.

    월미도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닷물을 데워 목욕물로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조탕을 개발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후 월미도는 민간업체로 넘겨져 해변가에 대형 풀이 증설되고, 밀물 때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설계한 용궁각(龍宮閣)이라는 일본식 요정도 생겨났다.

    1935년 무렵에는 3층 목조 건물인 빈(濱)호텔이 건립되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들기도 했다.

    월미도는 일제 패망 때까지 근 2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해방 후 이 유원지 시설을 종업원들이 인수 운영하다가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월미도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옛 명성을 다시 찾고자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도 보지 못한 채 6.25동란으로 공터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월미도는 미군기지로, 다시 근래까지 우리나라 해군기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섬 둘에를 돌 수 있는 순환도로가 개방되어 있고,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어서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또 횟집과 카페 등이 줄지어 서 있고 놀이터가 자리 잡고 있어서 경인지역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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