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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600년 기념특별전, 조선 근본의 땅 경기(朝鮮根本之地 京畿)
    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5. 2. 8. 04:00

    경기도 600년 기념특별전,

    조선 근본의 땅 경기(朝鮮根本之地 京畿)

     

    경기도박물관에서는 2014년 11월 19일부터 2015년 2월 22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경기 정도 600주년 기념 특별전 ‘조선 근본의 땅, 경기’(朝鮮根本之地, 京畿)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나라의 뿌리’이자 ‘개혁의 중심’이었던 ‘경기’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마련된 자리로,

    경기도박물관 소장유물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고려대박물관 등에서 출품한

    경기도 600년 관련 보물 7점을 비롯한 100점의 유물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크게 1부 ‘경기도가 되다’, 2부 ‘개혁을 꿈꾸다’,

    3부 ‘조선의 문화를 이끌다’, 4부 ‘근대와 현대의 경기도’로 구성됐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경기도박물관

     

     

    조선 근본의 땅, 경기(朝鮮根本之地 京畿)

     

    1414년(태종 14년) 음력 1월 18일 경기좌. 우도를 합쳐 “경기(京畿)”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은 “경기도”가 된지 6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간 이 지역은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역사.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경기도박물관에서는 경기도 600년을 기념하여 “조선 근본의 땅, 경기(朝鮮根本之地 京畿)” 특별전시회를 마련하였습니다.

    고려~조선시대 경기도는 빼어난 자연. 지리적 조건과 사회. 경제. 문화적인 토대가 마련되어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서해의 바닷길로 발달된 문화가 가장 빨리 전해지는 지역이었고,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하여 국토의 남과 북, 동과 서를 쉽게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길은 “경기”로 통했고, 그 길을 따라 사람과 물자가 오갔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며 자연스럽게 변화와 개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조선 왕조에서 “경기”를 “국가 근본의 땅”이라고 표현했던 이유입니다. 

     

     

     

    畿甸山河(기전산하, 경기산하)-權近(권근 1352~1409)

     

    疊嶂環畿甸(첩장환기전)- 겹친 멧부리는 경기에 들러 있고

    長江帶國城(장강대국성)- 긴 강은 도성에 띠를 둘렀구나.

    美形勝自天成(미형승자천성)- 아름답다 좋은 형세 절로 이루었으니

    眞箇是玉京(진개시옥경)- 이야말로 참말 왕경의 터로세

    道里均皆適(도리균개적)- 사방 길은 고르게 모두 알맞고

    原田沃可耕(원전옥가경)- 들밭은 기름져 농사지을 만하네

    居民富庶樂昇平(거민부서악승평)- 백성이 넉넉하여 태평 즐기니

    處處有歌聲(처처유가성)- 곳곳에서 노랫소리 들리는구나.

     

     


    경기도(京畿道) 이야기

     

    "경기(京畿)"는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지역을 가르키는 말로

    수도와 왕실을 수호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경기(京畿)"는 한나라의 가장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 주변이, 조선시대에는 한양 주변지역이 경기가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경기(京畿)"이라는 명칭이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1018년 당시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13개현을 묶어 "경기"라고 부르며 제도를 운영하면서 부터이다.

    "경기"는 1069년에 52현으로 확대 되었고, 1390년에는 도(道)로 확립되면서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다.

    조선은 건국 이후 민심을 안정시키고 여러 제도를 새롭게 마련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1414년 경기 좌. 우도를 합쳐 "경기"라 일컬은 것이 600년 "경기도" 역사의 시작점이다.

    세종 때에는 현재와 비슷한 위치와 윤곽을 갖추게 된다.

    500여년을 유지해 온 8도제는 1895년 을미개혁에 따라 23부제로 바뀌었다.

    이때 경기도는 한성. 인천, 개성, 충주. 공주 등 6개의 부로 나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가 되면서 다시 경기도가 되었다.

    이후 복잡한 행정구역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된다.

    현재 125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경기도는 전국의 10%에 달하는 면적,

    38개의 시(市) 3개 군(郡)의 행정구역을 갖추고 있다.

     

     

     

     


    국조팔도총도(國朝八道摠圖)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근대(近代)와 현대(現代)의 경기도(京畿道)

     

    19세기 중반이후 세계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앞세워 동아시아를 침탈하기 시작했다.

    조선 역시 그들의 대상 중에 하나였고, 도읍인 한양을 에워싸고 있는 경기도는 그들의 침략에 1차적인 목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펴고 있던 조선은 1866년(고종 3년) 프랑스와의 병인양요(丙寅洋擾),

    1871년 미국과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통상(通商)을 요구하는 열강과 마찰이 있었다.

    또 1876년(고종 13년)에는 의도적으로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킨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고, 이후 열강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조선에 진출한 열강, 특히 호시탐탐 주권을 노리고 있던 일본에 맞서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1895년(고종 32년) 일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에 맞선 을미의병(乙未義兵),

    1905년(광무 9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과 1907년(융희 1년)의 군대 해산에 맞선 의병 등이

    어느 곳보다 경기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등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국권의 회복을 국내의 독립운동 역시 경기 지역에서 활발하였다.

    경기도는 1945년의 광복 이후 우리나라 산업화의 주요 현장이었다.

    많은 공장과 산업단지가 경기도에 만들어졌고, 그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의 동력이었다.

    1970년대 이후 전기, 전자, 반도체, 휴대전화 등 첨단산업도 경기도를 기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21세기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조선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던 경기사대부(京畿士大夫)의 역사적 경험들은

    21세기 융합, 변혁의 사회를 준비하는 우리와 맞닿아 있다.

    6백년 동안 경기(京畿), 경기도(京畿道)의 역할은 여기에 있다.

     

     

     

     

     

     

     

    조선 백자의 진수, 분원 백자(分院 白磁)

     

    조선 왕실은 1467년경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할 고급 백자(白磁)를 만들기 위해

    경기도 광주(廣州)에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을 설치하였다.

    광주는 서울과 가깝고 특히 한강을 이용한 운송이 편리하였으며,

    땔감이 풍부하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5세기 말부터 광주 일대의 분원 가마에서는 전국에서 엄선된

    380명의 장인들이 조선 최고의 백자와 청화백자를 제작하였다.

    분원은 땔감 등의 원료 수급을 위해 대략 10년에 한 번 씩은 옮겨야만 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1752년(영조 28년)에 분원은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최상품의 백자를 생산하며 조선의 도자산업(陶瓷産業)을 이끌었지만,

    19세기 말 재료 조달의 어려움과 민간 자본의 유입이 심화되면서

    관영(官營)의 분원(分院)은 민영화가 결정되었다.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된 분원백자는

    경기 역사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림으로 보는 경기(京畿)

     

    18세기에 이르러 여러 문인과 화가들은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주변 풍경을 그리거나

    선배. 벗들이 다녀와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와유(臥遊)가 폭 넓게 확대되었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이다.

    경기도 곳곳의 풍광은 특히 진경산수의 대상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뛰어난 자연환경과 함께 경기도는 그들의 사는 곳과 가까워 쉽게 갈 수 있었고,

    활동지역 자체가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화단을 대표하는 정선, 강세황, 김홍도, 정수영 등의 작품에서

    어김없이 경기의 산하를 찾아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한강과 임진강 주변 등 강변의 풍경이 많이 그려졌고, 중국 문인화풍과 서양화풍 등의

    다양한 화법이 시도되었다는 점 등은 경기 지역 산수화의 큰 특징이다.

    조선 중기에 그려진 경기 지역의 산수가 왕실의 필요에 의해 전문 화가가 제작한 국가적인 기록화 성격이 강했다면,

    조선 후기에는 개인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활동공간, 기억하고 싶은 모임, 유람 등이 주요 소재로 그려졌다.

    작품활동을 하는 계층도 화원에서 나아가 문인 화가, 민간의 직업 화가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경기 산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이원익 초상(李元翼 肖像)

     

     

     

     

    개혁(改革)을 위한 승부수 화성(華城)

     

    화성(華城)에 담긴 정조(正祖)의 꿈

     

    1776년 3월, 정조(正祖)는 조선의 22번째 임금이 되었다.

    그는 영조가 추진한 탕평(蕩平) 정책을 이어 받으면서 조선을 새롭게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치. 사회의 개혁은 백성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그는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로 불릴만한 시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한 정조는 재임기간 내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명예를 되찾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도일 뿐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1789년(정조 13년) 아버지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시립대)에서

    수원도호부의 중심(읍치)으로 옮기고, 이름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다.

    대신 수원 읍치를 현재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도시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그리고 1794년(정조 18년) 봄, 그곳에 자신의 꿈이 담긴 화성(華城)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의 무덤과 행궁(行宮)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정조에게는 또 하나의 계획이 있었으니 바로 왕세자(후에 순조)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화성에 내려가려던 것이다.

    자신은 진행 중인 여러 개혁사업에 더욱 집중하면서

    순조에게도 계승시켜 백성을 위한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하였다.

    10년의 공사 기간을 목표로 한 화성은 34개월이라는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정조의 치밀한 계획 아래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 참여한 결과였다.

     

     


    정조 초상(正祖 肖像)

     

     

     


    화성전도 도설(華城全圖 圖說)- 화성 공사 보고서

     

     


    거중기전도 기계각도(擧重器全圖 器械各圖) - 거중기 도면(화성 공사 보고서, 華城城役儀軌)

     

     


    정약용 초상(丁若鏞 肖像)

     

     

     


    채제공 호패(蔡濟恭 號牌)

     

     

     

    개혁(改革)을 위한 승부수 화성(華城)

     

    모든 백성이 하나 되어 쌓은 화성

     

    정조는 본격적인 화성 건설에 앞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전체적인 계획안을 만들게 하였고, 정약용은 성설(城說)을 지어 바쳤다.

    1794년 1월 7일 드디어 화성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화성 축성의 총책임은 총리대신(總理大臣) 채제공(蔡濟恭)이 맡아 공사를 총괄했다.

    현장 공사의 실무책임은 화성유수인 조심태(趙心泰, 1740~1799)가 맡았고

    그 외 관리자와 실무자, 기술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최고의 성을 쌓기 위해 우리나라의 성곽은 물론 중국 성곽의 장단점을 비교 분석하여 참고하였다.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擧重器), 유형거(遊衡車)를 비롯한 새로운 기구와 기계가 선보였다.

    우리 축성 기술에 청나라로부터 들여온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합쳐

    당시로서는 최신의 방법으로 최대의 효율성을 올렸다.

    또한 작업능률을 올리고자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하지 않고 전부 임금을 지불하였으며,

    벽돌과 석물 등 화성건설에 필요한 자재들도 대량 생산해서 사용하였다.

    1796년 9월 10일 공사를 마쳤으니 총 기간 34개월, 실제 공사기간 28개월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국왕으로부터 담당자까지의 열정과 지혜를 모으고 모든 힘을 집중시킨 결과였다.

     

     


    조심태 초상(趙心泰 肖像)

     

     

     


    반계수록(磻溪隨錄)

     

     


    성호집(星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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