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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지사 사명각(直指寺 四溟閣)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5. 2. 25. 04:11

    직지사 사명각(直指寺 四溟閣)

     

    사명각(四溟閣)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호국대성 유정(護國大聖 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영탱을 봉안하여

    대사의 유덕을 기리는 건물로서 조선 정조 11년(1787)에 창건되었다.

    현 건물은 수차례 중수를 거쳐 녹원 화상에 의하여 석조축대를 신축하고 현재의 건물은 1975년 해체 복원한 것이다.

    현판은 고 박정희대통령의 친필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쓴 것이 특이하다.

    사명대사(1544~1610)의 속성은 임씨, 자는 이환(離幻)이며, 법명은 유정(惟政), 법호는 사명(四溟) 또는 송운(松雲)이다.

    1544년 10월 17일에 경남 밀양의 무안면 고나리에서 태어나 15세에는 황악산 아래 유촌 황여헌으로부터 유학을 수학하더니

    곧 황악산 직지사로 출가하여 주지 신묵화상(信黙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18세가 되는 명종 16년(1561)에는 선과에 합격하고, 30세인 선조 6년(1573)에는 직지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49세가 되는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적의 진중에 여러 차례 드나들며 왜적을 설득하여 백성들의 화를 면하게 하더니

    선조 37년(1604년)에는 61세의 몸으로 일본에 건너가 억류되었던 포로 3,5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하므로

    선조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삼아 어마를 하사하는 등 대우가 극진하였다.

    광해군 2년(1610년) 67세를 일기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하니 시호(諡號)를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운수리) =

     

     

     

     

     

     

    사명각(四溟閣) 내부의 사명대사(四溟大師) 영탱(影幀)

     

     

    사절단 일행이 경도 가까이 오자 30리에서부터 중간 중간에 장막을 치고

    그 앞에 병풍을 둘러치고 병풍에는 일본 사람이 지은 시를 써 놓았다.

    대사는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미리 보이는 시를 모두 외워 두었다.

    경도에 도착하니 일본에서 가장 학문이 뛰어난 두 사람의 중이  "우리 일본의 시를 평해 주십시요."  하는 것이었다.

    대사는 길가에 세운 병풍의 시를 한 수 두 수 외워가며 그 형식과 내용의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을 평 하니,

    깜짝 놀라며 귀신같은 재주라고 감탄하였다.

    또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는데 수백 수의 시를 다 외우니, 그만 신승이라고 감탄하고 말았으며

    이 사실을 덕천가강에게 보고하니 가강도 놀라며 좀 더 시험해 볼 궁리를 하였다.

     

     

    사명대사를 방바닥이 철판으로 된 조그만 방에 모시는 것이었다.

     " 아하, 이 놈들이 무슨 딴 흉계를 꾸미는 것이구나."  마음속으로만 짐작하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 후 방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이번에는 아무리 도가 높아도 견디지 못하겠지."  하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사명대사는 품고 온 과일 세 개를 꺼내어 하나는 자리 밑에 깔고,

    두 개는 양손에 갈라 쥐고 서리 상(霜)자와 눈 설(雪)자를 네 벽에 써 붙이고

     정신을 통일하여 자기만 알고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며 앉아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본인들이 문을 열고 보니 사명대사는 수염에 고드름이 달린 채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방바닥도 싸늘하였다.

    사명대사는 놀라는 왜인들을 보고  " 너희 나라가 우리 나라보다 따뜻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 밤에 어찌 그리고 추우냐? 사람 대접을 어찌 그렇게 하느냐?"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일본인들은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훌륭한 스님이 온다 하여 가마가 지날 때 마다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두 손을 모으며 합장하는 것이었다.

     

     

    사명대사 일행이 11월 초순 일본에 도착하자 덕천가강은 약 500명의 영접단을 보내어

    사명대사 일행을 모시니 그 규모가 굉장하였다.

     

     

    신묵대사가 사명당을 만나는 날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중 꿈에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용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 그 자리에 가보니 한 소년이 자고 있었다.

    신묵대사는 그 소년을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사명대사이다.

    당시 은행나무는 1800년 만세루가 불타면서 같이 타버렸고,

    현재 천왕문 앞에 있는 돌은 소년 사명당이 낮잠을 자던 돌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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