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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악산 직지사(黃嶽山 直指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5. 2. 24. 23:00

    황악산 직지사(黃嶽山 直指寺)

     

    황악산 자락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는 천년역사의 큰 가람이다.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되었다.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고,

     

     

    또 일설에는 창건주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일선군(선산) 냉산(冷山)에 도리사(桃李寺)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지었다는 전설도 있다.

     

     

     

    또 고려의 능여화상(能如和尙)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이고,

     

     

    두 번째는 경순왕 4년(930) 천묵대사(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이다.

     

     

    먼저 자장법사(慈藏法師)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천묵대사(天默大師)의 중수는 자세히 전해진다.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다.

     

     

    직지사 사적기에 따르면 천묵대사는 중수뿐만 아니라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직지사에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조사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사찰을 일으키다 광종 원년(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를 개설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

    이 경찬회는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장당기비의 현존 유품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의 탁본이 전해 온다.

     

     

    대장당기비는 왕우군(王右軍--왕휘지)과 탄연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탄연(坦然)은 12세기 초 고려의 명필이자 선승이었고 왕휘지 글씨에 탁월 하였다.

     

     

    조선시대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 중기에는 직지사에서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진묵대사(震默大師)에게 사미니계(沙彌尼戒)를 받고 출가를 하였다.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 사명대사는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출가한 사찰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병들의 보복은 더욱 가혹하였다.

     

     

    대웅전 앞의 5층목탑을 비롯한 40동의 건물이 불타고 전해오던 모든 유물들이 유실되었으며

     

     

    오직 일주문, 천왕문, 비로전만이 온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이래 옛 사격을 되찾으려 엄청난 불사를 일으키고 다른 여러 곳의

     

     

    불교 문화재(보물급 탑만도 4기에 달한다)를 옮겨와 사찰에 배치하는 등 저간의 노력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 경북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운수리) 대한불교조계종 직지사 =

     

     

     

     

     

    직지문인송(直指文人松)

     

    이 직지사 소나무는 옛날 그 어느 때 해주(海州) 정씨(鄭氏)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예로부터 아들 낳기를 소망하거나 과거(科擧) 장원급제를 비는 아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때문에 정초에 동제(洞祭)를 지낼 때 말고는 거의 365일 내내 몽뚱어리에 금중 벗겨질 날이 없는 신목(神木)으로 통한다.

    일제시대엔 제국주의자들의 신사(神社)가 있어 기원을 드리는 일을 엄격히 통제했는데,

    언제 다녀갔는지 치성을 드린 흔적은 여러 형태로 여전히 남아있다.

    당시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하겠다.

    그만큼 이 소나무는 영험한 나무로 전해진다. 아무튼 이 소나무는 언제부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문인송(文人松)으로 불리어 왔다.

    그래서인지 후대에 이르러 문인송이란 이름에 걸맞게 이 소나무에서

    직선거리 100m 안에 문인이 세사람이나 배출되는 신묘(神妙)한 영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유별날 것도 없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문인이 세사람이나 나왔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김천 최초 문인으로 공식 등단한 홍성문 교수. 김천인 최초로 시집을 발간한 이정기 교수.

    그리고 이웃 봉산면 출신으로 결혼과 동시에 이 마을로 옮겨와 등단한 김천 최초의 소설가 심형준 선생이 그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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