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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장군(李相定將軍) 고택(古宅)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5. 5. 30. 05:30
이상정장군(李相定將軍) 고택(古宅)
1920년경 지은 한옥 골기와집으로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구성되었다.
이상정 장군(1897.6.10~1947.10.27)은 1916년에서 1945년까지 복무를 하였으며 대한독립군 중장을 역임했다.
독립유공자로서 일제강점기시인. 서예가. 화가. 조각가로 활동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일명은 이연호(李然皓)로
이상정장군은 이시우의 맏아들이자 시인 이상화(李相和). 사학자 이상백(李相伯). 수렵가 이상오(李相旿)의 맏형(兄)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동경의 국학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오산, 경신, 계성, 신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8년 김구, 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7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귀국하였고, 귀국 후 40여일만에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며, 장례는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여성 비행사 1세대중 한분인 독립운동가 권기옥(權基玉) 여사가 부인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90번지
베일에 쌓인 남자 "이상정"
1947년 9월에 모친상을 치루기 위해 한 남자가 대구를 방문했다.
조국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상해에서 뒤늦게 환국하게 된다.
대구는 그를 “장군”이라 부르며 환영대회를 열어 성대히 맞이했다
“이연호(일본명)”라는 가명을 쓴 이장군은 겸손한 태도로 자기는 일개의 평민인데.
평민의 환국에 과분한 환영절차에 송구하다고 인사하였고
25년간 해외생활에 대한 간곡한 술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이장군은 상경하여 정계인사들과 환국인사들과 겸하여 만나고 대구로 돌아온다.
중안의 각 정당에서 출마종용을 했으나 두문杜門)한 채로
국내사정을 살펴보던 중 환국 1개월 만에 뇌일혈로 급사하게 된다.
“중국유기”에는 그의 서거를 한탄하며 정하택(鄭夏擇, 당시 동광내과의원 의사)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남자의 인생이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독립운동을 해야 할 때
이연호(李然浩)라는 가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연호, 그가 바로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대표 이상정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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