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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강제일경(落江第一景) "경천대(擎天臺), 일명 자천대(自天臺)"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5. 8. 29. 06:04

    낙강제일경(落江第一景) "경천대(擎天臺), 일명 자천대(自天臺)"

     

    사벌국(沙伐國) 옛땅에 자리한 경천대(擎天臺)는 하늘이 지은 절경이라 자천대(自天臺)로 일컬어왔으며,

    대(臺) 밑에 기우제터 우담(雩潭)이 있어 상산(商山)의 신성지였다.

    이땅에 최초로 우담 채득기(雩潭 蔡得沂,1604~1646)선생이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은거하였으니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나던 해요, 그런 까닭에 숭명사상으로 자천대 정상에다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여덟 자를 새긴 경천대비를 세움에 후세인이 자천대를 경천대라 불렀다.

    우담선생은 충정가의 후예로 학문에 뛰어나 빙고별좌에 제수된 징사(徵士)요, 신묘한 침술로 국난(國難)에 특채된 명의(名醫)였다.

    1637년 세자와 대군 등이 청(淸)나라의 볼모가 되어 심양(沈陽)으로 잡혀갈 때 충신(忠信)한 재학지사(才學之士)로 천거되어

    왕자들의 몸을 보호하란 명을 받았으나 그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하다가 도리어 유배되었다.

    1639년에 방면되어 재차 부르니 나라를 위해 목숨바칠 결연한 각오로 충신연주지사

    "봉산곡(鳳山曲), 일명 천대별곡(天臺別曲)"을 짓고 섣달에 심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과는 군신 이상의 지기(知己)로서 사생을 같이하며 망국민의 굴욕과 울분,

    복수일념의 충분의기(忠憤義氣)를 시로 주고받아 한국 시사(詩史)에 희귀한 시첩(詩帖) "군신언지록(君臣言志錄)"도 남기었다.

    1645년 환국한 뒤 봉림대군의 만류에도 굳이 경천대로 돌아왔음은 초지일관하려는 신하의 뜻이었고,

    충신의 사는 곳이나마 보고 싶어 화사(畵士)를 보내어 자천동 28경을 그려 갔음은 임금의 뜻둠이었다.

    실로 경천대야 말로 지사(志士)의 은거지로써 그 입구에 선생의 손때가 묻은 소연분(小蓮盆). 관분(세수대야). 약분(藥盆) 등이 

    고스란히 남은 유적지요 가사문학의 산실이며 충신의 입절지(立節地)요 요종의 은택지(恩澤地)로써,

    자연과 인문이 조화의 극치를 이룬 낙강제일경(落江第一景), 상주의 국민관광지이다.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여덟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우리나라를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당시에 국가에서 명나라의 숭정연호의 사용을 금지하자 충절의 뜻을 나태내기 위하여

    우담 채득기 선생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가노라 옥주봉(玉柱峯)아 있거라 경천대(擎天臺)야/요양만리(遼陽萬里) 길이 머다야 얼마 멀며
    북관일주년(北關一周年)이 오래다 하랴마는/상봉산(翔鳳山) 별건곤(別乾坤)을 처음의 드러올제
    노련(魯連)의 분(憤)을 계워 진세(塵世)를 아조싣고/발업신 동솟 한 개 전나귀 시러내여
    추풍석경사(秋風石經斜)의 와룡강(臥龍江) 찾아와서/천주봉 암혈하에 모옥수간(茅屋數間) 지어두고…

     

    -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 봉산곡(鳳山曲) 중에서 -

     

     봉산곡(鳳山曲)은 조선 인조 때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1604~1647)가 지은

    가사(歌辭)이고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한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인조로부터 호가(扈駕)를 명령받았으나,

    칭병(稱病)하고 거절하자 3년간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

    후일 임금(인조)이 다시 부르자 감격하여 이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정과 자연에 대한 애착을 읊었다.

    우담이 인조의 소명(召命)을 받들고  중국 청나라 심양으로 떠날 때

    이 경천대 아래 무우정(舞雩亭)에서 지은 일편단심의 충절가이다.

    모두 101구로서 3·4조 또는 4·4조로 되어 있다.

     

     

     

    우담 채득기(雩潭 蔡得沂)

     

    채득기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학정(鶴汀).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역학·천문·지리·의학·복서·음률·병진(兵陣) 등 백가(百家)에 밝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상주 자천대(自天臺)에 은거하면서 독서에 전념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이 청(淸)의 선양(瀋陽,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어,

    인조가 그에게 호종(扈從)할 것을 명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충청도 보은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한 끝에 다시 선양으로 불려가 왕자들을 모셨다.

    1644년 봉림대군과 함께 귀국한 후 관직을 사양하고 낙동강 유역 옥주봉(玉柱峯) 아래에 은거하며 지냈다.

    1798년(정조 22) 집의에 추증되었고, 상주 상의사(尙義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삼의일험방(三意一驗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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