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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명당, 금당실 전통마을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5. 9. 4. 04:39
천하명당, 금당실 전통마을
금당실은 마을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 초 감천문씨(문헌)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처향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 흔히 이런 곳을 우리는 승지(勝地)라고 일컫는다.
즉 이런 경치가 좋거나 지형이 뛰어난 곳, 10군데가 있다고 하니 그 중 한 곳이 금당실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이곳!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 한다.
또한 감천 문씨가 이곳을 개척했고 사위인 박종인과 변응영이 정착하여 지형을 피니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으로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매봉이 조산(組山)이 되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내룡(來龍)이 되어 연못을 상징해서 금당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군지에 따르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달구리재(학명현)'가 앞에 있고
'개우리재(견곡현)'가 오른쪽에 있으니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하여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 고가옥과 미로로 연결되어 있는
돌담길이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마을로서 역사, 문화, 전통이 강한 곳이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하여 재향 올리는 추원재,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
이외에도 개량된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어 전통생활양식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연못에 떠있는 연꽃을 상징하는 오미봉 공원과 마을의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막아주고
마을을 보호해주는 2km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금당실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금당실 사람들은 예부터 소나무를 베는 사람을 우물에 빠뜨릴 정도로 소나무를 아끼고 소중하게 보호하여 왔다.
최근에는 영화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상금곡리) =
예천군 용문면주민센터(용문면사무소)
龍跳天門(용도천문) - 용이 천문에서 뛰논다.
서예가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선생이 쓴 용도천문(龍跳天門)이
예천 금당실마을 용문면사무소 앞에 큰빗돌에 석각되어 있다.
우천재(愚泉齋)
위치: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56-14
건축연도: 1870년, 중수연도: 2007년, 소유자: 박좌상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연결된 튼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조선시대 전형적인 한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망와 명문에는 “康熙二十年(1681년) 辛酉四月 文人 金中元, 崔鍾山, 庚申夏造 己未夏造”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차 개수를 거쳐 1870년경 현재의 선물이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4.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우천재의 대지는 남서향의 긴 장방향이다.
대문채에서 북동쪽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본채로 향한다. 마당은 제법 넓다.
남쪽에는 우물이 있고 그 곁으로 장독대가 위치한다.
장독대는 보통 안채에 있는게 일반적이지만 너른 바깥마당을 활용했다.
반송재 고택(伴松齋 古宅)
반송재 고택(伴松齋 古宅)은 조선 숙종(肅宗) 때 도승지(道承旨)와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지낸
갈천(葛川) 김빈(金賓)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살던 집으로 금당실 동촌에 있다.
이 집은 김빈의 아우 김정이 1670~1690년경에 창건한 것을
구한말 법무대신(法務大臣)을 지낸 이유인(李裕寅)이 매입하여 광무(光武) 3년(1899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 하였으며,
현 소유자의 선대 때 다시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송재 고택(伴松齋 古宅)은 남향하는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사랑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정면 5칸과 측면 1칸 반의 ‘ㅡ자형’ 몸체 양끝에서 2칸 크기의 날개집을 앞으로 달아 낸 형태이다.
평면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왼쪽에 안방(2칸)과 정지, 오른쪽에 못방, 마루방, 아랫방을 달아 낸 형태이다.
대청은 5칸으로 매우 넓으며, 대청 오른편에 1칸 규모의 온돌방이 돌출되어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경계에는 사분합들문이 달려 있다. 건물 앞뒤에 반 칸 너비의 툇간을 둔 정면 5칸의 전후퇴집이다.
평면은 왼쪽부터 큰 사랑방 2칸, 사랑마루 2칸, 작은 사랑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큰 사랑방 측면과 배면에는 물품을 수장할 수 있는 벽장을 길게 만들어놓았다.
큰사랑방 안에는 네 짝 장지문을 달아 방의 전용성을 높였으며,
마루 앞 툇간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필요할 때 폐쇄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는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구조는 막돌 세벌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대들보와 종보를 받치는 오량가로 되어 있다.
천장은 마루상부만 연등천장이며, 온돌방에는 우물반자를 사용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옥 배치와 평면 구성법을 지니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단아한 고가(古家)이다.
반송재 고택(伴松齋古宅)은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진사당
위치: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80-7
건축연도: 1680년, 중수연도: 1884년, 소유자: 박연이
옛날 권진사가 살았다는 “ㅁ”자형의 한옥으로 안채가 1칸 폭의 3량집으로 폭이 좁은점이 특징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팔작지붕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동시에 건축하지는 않은 듯 하다.
본래 대문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흔적이 없다. 안채는 정면 5칸의 반 홑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대청 위의 대들보는 자연스럽게 휘어진 곡재를 사용하여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부엌 위에는 마루로 꾸며진 찬방이 있으며 광 위에 마루로 고미반자를 설치하여 공간 활용이 특이하다.
돌담사랑 민박
금당주막
용문정미소
금당실 풍수이야기
금당실은 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 가운데 한곳으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하여 예부터 외침이 많았던 조선 땅 중에서도 안전한 곳이며,
임진왜란 때도 온전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금당과 맛질을 합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마을 앞 금곡천에서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 한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으로 북쪽의 매봉(865m), 서쪽의 국사봉(728m), 동쪽의 옥녀봉(890m),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쌓인 분지형으로 매봉이 조산(祖山)이 되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小白山) 줄기가 내룡(來龍)이 되어 연못을 상징한다고 해서 금당(金塘)이라고도 한다.
금당실 역사이야기
금당실은 15세기초 갑천문씨 문헌(文獻)에 의해 개척된 곳이며,
이후 그의 증손자 문억경의 사위들인 박종린과 변응녕이 정착하여 살았다.
금당실에 가면 “옷자랑 하지말라”는 속담이 잇듯이 선비의 예법과 반가의 문화의식을 잘 간직한 마을이며,
금곡천과 선동천이 마을을 감싸고 도는 배산임수의 명당이나 금곡천을 따라 마을 앞쪽이 열려있어
허한 이곳을 막고 보(補)하기 위해 솔숲을 조성하여 마을의 액운을 막았다고 한다.
남사고는 “예천에 있는 금당동의 북쪽은 지세가 깊지 못해 밖으로 드러나 있으나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여러 대(代)에 걸쳐 편안함을 누릴 것이다.”라고 하여 일찍이 피난처로서 적지임을 예고하였으며,
임금의 수레가 이곳에 영향을 미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동학난 당시에 동학의 북접이 본부를 두고 관군을 격파해 버린 일이 발생하여
병과불입지지(兵戈不入之地)로서의 명성이 흔들렸으며
구한말 양주목사를 지낸 이유인이 왕의 피난처를 마련키 위해 금당실에 99칸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로써 임금의 영향이 미쳤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한편 사슴을 채취하려는 러시아 광부 치사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비보림인 소나무들을 베어 팔았던 일이 발생하여 상당수의 숲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의 천하명당 십승지(十勝地)
한국 천하명당 십승지란 조선 최대의 예언서 “정감록”에서 말하는 3재(전쟁, 흉년, 전염병)가 들어 올 수 없는
땅의 기운이 좋고 청정하고 안전한 지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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