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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천대관광지(擎天臺觀光地)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5. 9. 7. 05:54

    경천대관광지(擎天臺觀光地)

     

    영남의 상징이자 젖줄인 낙동강이 감싸 안은 “삼백의 고장” 상주는 성읍국가시대부터 사벌국,

    고령가야국의 부족국가가 번성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전국 9주, 고려시대에는 전국 8목중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하는 등 웅주거목의 고도로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자리해 왔다.

    또한 누란의 위급한 국난을 극복할 때에도 충과 효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앞세운

    많은 충신과 지사가 있어 자랑스러운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경천대(擎天臺)는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1,300여리 물길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의 칭송을 받아 온 곳으로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일명 자천대(自天臺)로 불리는 경천대(擎天臺)와

    낙동강물을 마시고 하늘로 솟구치는 학을 떠올리게 하는 천주봉,

    기암절벽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울창한 노송숲과 전망대,

    조선 인조 15년(1637) 당대의 석학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무우정과 경천대비,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장군의 용마전설과 말먹이통 등 명승지와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경천대 관광지내에는 전망대, 야영장, 목교, 출렁다리, MBC드라마 상도”세트장,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및 식당, 매점 등이 갖추어져 있고,

    소나무 숲속의 아담한 돌담길과 108기의 돌탑이 어우러진 산책로와 맨발체험장 및 황토길 등이 있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52 (삼덕리) 경천대관광지

     

     

     

    경천대(擎天臺)

     

    영남문화(嶺南文化)의 맥(脈)이요 젖줄인 낙동강(洛東江)의 신비(神秘)를 안은

    무지산(無知山) 경천대(擎天臺)는 천혜(天惠)의 절경(絶景)이다.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자천대(自天臺)로도 불리는 아름다운 28景의 승지(勝地)에 충혼(忠魂)이 서려있어 더욱 이름났다.

    우담 채득기선생(雩潭 蔡得沂先生)이 이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봉일정(捧日亭) 바위에

    대명천지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 8자를 새기고 올 곧은 충절(忠節)의 뜻을 키웠다.

    1637년(仁祖15년) 청(淸)나라 심양(審陽)으로 볼모로 잡혀간 세 왕자를 모시고 8년만에 돌아와

    봉림대군(鳳林大君, 1649년 孝宗卽位)을 도와 북벌(北伐)의 의지(意志)를 다졌으니 이때부터 경천대(擎天臺)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명장(名將) 정기룡장군(鄭起龍將軍)이

    이곳 용소(龍沼)에서  용마(龍馬)를 얻었다는 전설(傳說)이 서린 이곳의 빼어난 경관(景觀)을 김상헌(金尙憲) 등

    많은 문사(文士)들이 절조(節操)와 자연(自然)을 찬미(讚美)하는 명문(名文)을 남겼으니

    그 풍광(風光) 그 정취(情趣)가 낙동(洛東) 푸른 물에 비치도다.

    우담선생(雩潭先生)의 천대별곡(天臺別曲=봉산곡,鳳山曲)은

    이곳의 경치(景致)와 나라 爲한 기개(氣槪)를 읊은 가사(歌詞)이기도 하다.

     

     

     

    정기룡(鄭起龍), 1562년(명종 17년)~1622년(광해군 14년)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곤양 정씨(昆陽鄭氏)의 시조

    초명은 무수(茂壽).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경남 하동 곤양 출신.

    증 호조참판 철석(哲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판서 의걸(義傑)이고, 아버지는 증 좌찬성 호(浩)이다.

    1580년(선조 13)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고 다음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해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방어의 계책을 제시하였다.

    또한 거창싸움에서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김산(金山)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했고,

    곤양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 유병별장(游兵別將)이 지내고, 상주목사 김해(金澥)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되어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물리치고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토왜대장(討倭大將)으로서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성주·합천·초계·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절충장군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해 경주·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摠兵)직을 대행해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오르고, 이듬해 다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방어사로 나가 다시 침입해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처했고,

    다음 해 김해부사·밀양부사·중도방어사(中道防禦使)를 역임하였다.

    그 뒤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죽었다.

    상주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상도 드라마 촬영장(세트장)

     

    드라마 촬영장(세트장)은 2001년 10월에 MBC가

    창사 40주년 특별 기획드라마 “상도” 촬영을 위하여 상주시와 공동투자로 만든 세트장이다.

    그후 KBS, MBC, SBS 등 방송사에서 드라마 촬영시 자주 사용하는 곳이며

    천대를 찾는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경천대(擎天臺), 일명 자천대(自天臺)

     

    사벌국(沙伐國) 옛땅에 자리한 경천대(擎天臺)는 하늘이 지은 절경이라 자천대(自天臺)로 일컬어왔으며,

    대(臺) 밑에 기우제터 우담(雩潭)이 있어 상산(商山)의 신성지였다.

    이땅에 최초로 우담 채득기(雩潭 蔡得沂,1604~1646)선생이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은거하였으니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나던 해요, 그런 까닭에 숭명사상으로 자천대 정상에다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여덟 자를 새긴 경천대비를 세움에 후세인이 자천대를 경천대라 불렀다.

    우담선생은 충정가의 후예로 학문에 뛰어나 빙고별좌에 제수된 징사(徵士)요, 신묘한 침술로 국난(國難)에 특채된 명의(名醫)였다.

    1637년 세자와 대군 등이 청(淸)나라의 볼모가 되어 심양(沈陽)으로 잡혀갈 때 충신(忠信)한 재학지사(才學之士)로 천거되어

    왕자들의 몸을 보호하란 명을 받았으나 그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하다가 도리어 유배되었다.

    1639년에 방면되어 재차 부르니 나라를 위해 목숨바칠 결연한 각오로 충신연주지사

    "봉산곡(鳳山曲), 일명 천대별곡(天臺別曲)"을 짓고 섣달에 심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과는 군신 이상의 지기(知己)로서 사생을 같이하며 망국민의 굴욕과 울분,

    복수일념의 충분의기(忠憤義氣)를 시로 주고받아 한국 시사(詩史)에 희귀한 시첩(詩帖) "군신언지록(君臣言志錄)"도 남기었다.

    1645년 환국한 뒤 봉림대군의 만류에도 굳이 경천대로 돌아왔음은 초지일관하려는 신하의 뜻이었고,

    충신의 사는 곳이나마 보고 싶어 화사(畵士)를 보내어 자천동 28경을 그려 갔음은 임금의 뜻둠이었다.

    실로 경천대야 말로 지사(志士)의 은거지로써 그 입구에 선생의 손때가 묻은 소연분(小蓮盆). 관분(세수대야). 약분(藥盆) 등이

    고스란히 남은 유적지요 가사문학의 산실이며 충신의 입절지(立節地)요 요종의 은택지(恩澤地)로써,

    자연과 인문이 조화의 극치를 이룬 낙강제일경(落江第一景), 상주의 국민관광지이다.

     

     

     

     

    무우정(舞雩亭)

     

    무우정(舞雩亭)은 우담 채득기(雩潭 蔡得沂,1604~1646)선생이

    1636년(인조 11년)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2~1637.1)을 예견하고

    숭명(崇明)의 의리를 지켜 은거하여 자연에 귀의하려 지은 정자이다.

    무우(舞雩)란 춤을 추며 비를 빈다는 뜻이요 정자도 기우제터 우담(雩潭)위에 세워졌으나,

    선생은 자연을 벗 삼아 도(道)를 즐긴다는 풍호영귀(風乎詠歸)의 뜻을 취하여 그 이름을 삼았노라 밝히었다.

    무우정(舞雩亭)은 국난에 목숨바쳐 신하의 도리를 다하리라 맹세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

     “봉산곡(鳳山曲), 일명 천대별고(天臺別曲)”의 산실이요, 청(淸)나라의 볼모가 된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봉림대군(鳳林大君,1616~1659,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의 주치의로 특채된 재학지사(才學之士)로서

    망국의 한을 품은 왕자들과 7년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 우담선생이 천추에 고절(高節)을 세운 유서깊은 현장이다.

    그러기에 청음 김상용,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 계당 유주목(溪堂 柳疇睦) 등이

    기문을 지어 강산이 절사(節士)를 만나 그 무게를 더하였다 기리었거니와

    후대에는 경천대(擎天臺) 무우정(舞雩亭)이 낙강시회(落江詩會)의 중심이 되어

    문향(文鄕) 상주(尙州)를 전국에 알리는 종루(鐘樓)가 되기도 하였다.

    무우정(舞雩亭)은 옛 것을 지켜 새 것을 창출하려는 뜻있는 분들에 의하여

    1748년에는 상주목사 이협(尙州牧使 李埉)이 중건하였고, 1948년과 2005년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먼 뒷날에도 상산낙수(商山洛水) 거느리고 늘 여기 지켜 섰을 것이다.

    무우정(舞雩亭)은  정면 3칸(6.9m), 측면 1.5칸(3.35m), 면적 약 7평(23.11)이다.

     

     

     

     

    봉산곡(鳳山曲)

     

    가노라 옥주봉(玉柱峯)아 있거라 경천대(擎天臺)야/요양만리(遼陽萬里) 길이 머다야 얼마 멀며
    북관일주년(北關一周年)이 오래다 하랴마는/상봉산(翔鳳山) 별건곤(別乾坤)을 처음의 드러올제
    노련(魯連)의 분(憤)을 계워 진세(塵世)를 아조싣고/발업신 동솟 한 개 전나귀 시러내여
    추풍석경사(秋風石經斜)의 와룡강(臥龍江) 찾아와서/천주봉 암혈하에 모옥수간(茅屋數間) 지어두고…

     

    -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 봉산곡(鳳山曲) 중에서 -

     

     봉산곡(鳳山曲)은 조선 인조 때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1604~1647)가 지은

    가사(歌辭)이고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한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 때 인조로부터 호가(扈駕)를 명령받았으나,

    칭병(稱病)하고 거절하자 3년간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

    후일 임금(인조)이 다시 부르자 감격하여 이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정과 자연에 대한 애착을 읊었다.

    우담이 인조의 소명(召命)을 받들고  중국 청나라 심양으로 떠날 때

    이 경천대 아래 무우정(舞雩亭)에서 지은 일편단심의 충절가이다.

    모두 101구로서 3·4조 또는 4·4조로 되어 있다.

     

     

     

     

     

     

     

    우담 채득기선생(雩潭 蔡得沂先生) 살던 집터

     

    - 구조: 본채(방 2칸, 부엌 1칸), 아랫채(방 1칸, 말마굿간, 디딜방아)

     

    이곳은 우담 채득기선생이 살던 집터이다.

    우담 채득기선생은 1604년(선조 37년) 충주시 금남면 삼생리 만개에서 태어나 화산 선유동과 공검 무지산(공검지 서쪽산)에 살았다.

    1628년 이곳에 와서 초가삼간과 무우정을 짓고 살다가 병자호란 후인 1637년(인조 15년) 2월 5일

    세 왕자(소현새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가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다.

    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우담선생을 천거하였으므로 1638년 12월에 심양으로 떠나

    1645년 5월까지 세 왕자를 시봉한 후 돌아왔다.

    그뒤 봉림대군이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사양하고 1647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우담선생이 살았던 집은 경천대가 국민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상주시에서 매입하여 초가삼간을 철거하였다.

     

     

     

     

     

     

     

     

     

     

     

     

     

     

     

     

     

     

     

    1년 뒤에 발송되는 느린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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