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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5. 9. 21. 02:54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항일 독립 운동사에 길이 빛날 구국 정신의 결성이다.

    1907년 1월 29일, 애국 계몽 단체인 대구 광문회(회장 김광제)에서 서상돈 선생이 건의함으로써 첫 횃불이 올랐다.

    "일본 차관 1300만원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를 맞았으니,

    담배를 끊어서라도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아 국권과 국토를 보존하자"는 외침에

    200여 회원들은 분발하여 즉각 전국적으로 실행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2월21일 북후정 에서 열린 "국채 보상 대국 군민 대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다투어 참가했으며,

    남일동에 사는 부인 일곱사람이 패물을 바침으로써 전국여성 국채보상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이름 없는 걸인으로 부터 고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국 운동으로 승화하였다.

    이 비폭력 항일 정신은 뒷날 3.1운동과 물산장려 운동 등으로 이어져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이 되었다.

     

    =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 (동인동 2가) =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취지문

     

    삼가 아룁니다.

    무릇 시민이 충(忠)으로 행하고 의(義)를 숭상하면 이로써 그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편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의가 없으면 이로써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고금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음이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구주(歐州)에서도 부강한 나라와 멸망한 나라들의 역사는 모두가 충의를 소중히 하고 숭상하는지 여하에 기인하는 바라.

    근세 역사를 보건데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진멸한 에집트나 월남 폴란드 등의 국민은

    모두가 단지 자기 한 몸과 자기집만을 알 뿐 군주나 국가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인 즉,

    이는 자함자멸(自陷自滅)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열심하여 충의를 분발할 때가 아니리오.

    그러나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다.

    2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

    아 2천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가 있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원하노니,

    대한의 신민과 여러 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여 알려서 모르는 이 한 사람도 없게 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명(聖明)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유지하기를 천만 행심이로다.

     

    설명문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자에 보도된 순한문 취지문으로 대구광문회 서상돈 선생의

    국채보상 발의를 2백여 회원의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국채 1천 3백만원 보상 취지문을 작성, 전국 각 도에 공한한 내용임.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1920)

     

    석람 김광제는 1866(고종3년) 7월 1일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1888(고종25년)에 병조 효력부위에 제수되어 통훈대부 훈련원 검정의 관직을 지냈다.

    1902년(광무6년)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를 거쳐 호남시찰사 및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905년에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왕궁마저 일본군의 수비를 맡게 되자 경무관이던 김광제는 분연히 사직하고

    12월에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러나 간계에 몰려 오히려 고군산도로 유배를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우국충절이 밝혀져 2개월만에 특별사면 되었다.

    1907년 2월 그는 대구로 내려가 광문사라는 인쇄소겸 출판사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출판을 통하여 한국 민족에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고 계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상이 노골화되자 1907년 서상돈(徐相敦) 등과 국채보상회(國債報償會)를 조직하였으며,

    전국민이 3개월간 금연(禁煙)한 돈으로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에서 차관한 1,300만 원을 갚고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는 운동을 벌였다.

     

     

    독립지사, 서상돈(徐相燉, 1850.10.17~1913. 6.30)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이다.

    경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1871년 대구로 가서 지물행상과 포목상등을 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 운동은 비록 일제의 방해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으나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관하여 한국인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의 태동

     

    대구지역은 조선시대 후기 이래 경상도 내륙지방 상업의 중심지로 개항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였고,

    상업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상이계층과 지역인사 등이 주권수호운동에 참여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서면서 국채보상운동의 불씨가 형성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의 창립과 1898년 만민공동회의의 활동이 전개되자,

    1898년 대구에서는 독립협회지회를 개설하고 교육보급, 민중계몽 등의 수호활동을 펴 나갔는데

    서상돈은 재무부장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1903년 경부선 철도공사를 계기로 일본인들의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일본 거류민회가 조직되었고,

    1906년 9월 대구이사청(大邱理事廳)이 설치되면서 대구 일본거류민단과 대구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만들어졌다.

    대구지역 상인들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항하여 大邱民議所(대구상공회의소의 전신)를 조직하였으며,

    그 후 대구민의소는 대구상무소(大邱商務所)를 만들었는데 그 중심세력은 서상돈을 위시한 서문시장 상인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달서여학교, 협성학교, 성립학교 등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이 운동을 주도하던 조직은1906년 1월에 세워진 大邱廣文社였다. 대구광문사는 1906년 1월 서상돈, 김광제, 정규옥 등이

    신교육을 위한 교과서,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으로 상인층을 중심으로 전직관료, 유생층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영남일보라는 신문발간도 추진하여 이 해 6월 농상공부로부터 발간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1907년에 들어 대구 광문사는 교육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지역인사 600명으로

    별도의 조직인 문회(文會)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대구광문회(大邱廣文會)였다.

    서상돈에 의해 대구지역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되었던곳도 대구광문회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명하려던 자리였다.

    이렇게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주권수호를 위해 꾸준히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이 불씨가 되어

    국채보상운동이라는 범국민적 경제주권수호운동의 불꽃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 감동의 불바다로 변하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지식인과 상인층의 주도로 점화된 국채보상운동은

    2월21일 대구 서문 밖 수창사(壽昌社)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 설치를 시작으로 본격화 되었다.

    북후정에서는 대규모 대구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 3개월간 담배를 피우지 말고

    그 대금을 수납하자'는 연설이 있었고, 이에 호응한 군중들은 담배와 담배갑을 던져버리고 국채보상운동에동참하였으며,

    연이어 거지, 백정, 마부, 야채상인, 주모, 노비, 날품팔이꾼까지 돈을 내는데 앞장섰는데, 천날에 모인 돈이 500원을 넘었다.

    북후정 군민대회의 흥분과 감동은 국채보상을 위한 본격적 행동으로 대구 전역에서 나타났다.

    이틀 뒤인 2월 23일에는 남일동에 거주하는 부녀자들이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나라를 구하는 데는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며 기꺼이 패물(佩物)을 내놓았으며, 기생 앵무도 수합사무소를 찾아와 100원을 의연(義捐)하였다.

    특히 기생 앵무는 누구든지 기천원을 의연하면 죽을 때까지 따르겠다고 하여 서상돈 등 관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앉은뱅이 걸인이 수합사무소에 와서 의연하고 담뱃대를 부러뜨렸는데,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감동하여 의연금을 내어 놓았고, 부인들은 은가락지, 은장도 등을 그 자리에서 의연하였다.

    이제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한 남자들의 단연 운동을 넘어,

    여성들의 패물금지, 먹을 것을 줄여 이를 모금하는 감자(減餐), 감선(減膳) 등의 형태로 이어져

    그야말로 대구는 국채보상을 위한 감격과 감동의 불바다로 변하면서 이 열기를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했다.

     

     

     

     

     

     

     

     

     

    일제의 탄압과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처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 되었을 때, 통감부는 한국인의 성격을 보아 단연 운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가볍게 보아 넘겼다.

    일본의 시사신보 같은데서는 '한국민의 빈곤으로는 거액을 수집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외국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이 전 국민적 운동으로 번져나가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여용단체인 일진회 등을 통해 방해공작을 펴는 한편,

    애국적인 언론 및 정치.사회활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제정.공포하였다.

    보안법의 공포로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적 단체인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고,

    신문지법에 의한 언론탄압이 강화되면서 민족지의 언론활동이 위축되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베델 등은 일제의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민중과 밀착하여 운동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일제는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영국인 베델을 추방하고자

    3차에 걸친 공작을 폈으나 영국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일제는 이른바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날조하여

    언론을 통한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꺽고 운동을 좌절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7월에 대한매일신보사 총무이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회계책임을 맡고 있던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으로 구속하였으나 결국 양기탁은 무죄선고를 받았다.

    양기탁은 비록 무죄를 받았지만, 이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이 커져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꺽고 운동을 좌절 시키려는 일제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조종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반대하고 국채보상운동기성회의 해산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집요한 일제의 탄압으로 자발적인 국민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침체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좌절되었으나 국채보상운동의 전국민적 참여는 애국심을 고취하고

    항일의식을 고조시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끊임없이 전개되는 국권회복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황성신문 제호와 논설 "단연보국채" (1907년 2월 25일)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글이 실린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8일)

     

     

    국채보상운동 논설이 실린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8일)

     

     

    "국채보상론"이라는 논설이 실린 경향신문 (1907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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