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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장군 유적지(申乭石將軍 遺跡地)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5. 7. 29. 04:57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장군 유적지(申乭石將軍 遺跡地)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짓밟혀 갈 때,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깃발을 높이 세운 분이 있으니, 바로 신돌석(申乭石) 의병장(義兵將)이다.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태어난 장군의 본명은 태호(泰鎬), 어릴때 이름이 돌석(乭石)이었다.

    용맹과 기백을 타고난 장군은 1896년 경기도 광주의 김하락(金河洛) 의병부대가 이곳 영덕으로 이동해 오자,

    18세의 어린나이에 이미 중군장(中軍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 전투에서 뛰어난 힘을 발휘 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장군은 1906년 3월에 영해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陳)을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2년 8개월 동안 청하, 영덕, 영해, 청송, 울진, 의성, 영양, 봉화, 삼척, 강릉 등지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으니,

    일본군은 장군을 "태백산 호랑이"라 부르며 두려워 하였다.

    1908년 12월에 엄동설한 추위를 앞두고 의병진을 일단 해산시킨 장군은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기고자 계획하던 중,

    그해 12월 12일에 일제의 앞잡이에 의해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서 살해 되었다.

    장군의 30년 짧은 생애 가운데 청년시대 12년을 의병항쟁에 몸 바쳤고,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 갔다.

    우리정부는 장군의 공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71년 국립묘지 유공자묘역에 그를 안장하였다.

    그리고 영덕군과 국가보훈처는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인 이곳을 성역화(聖域化) 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1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 사당(祠堂) 1동,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각 1동, 기념관 1동을 세웠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규모는 동일하며 정면3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맞배지붕을 하였다.

    사당안에는 신돌석 장군(申乭石將軍)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순국의사 신돌석장군 기념비

     

    의병대장 신공유허비

     

     

     

    의병대장 신돌석장군 흉상

     

     

     

     

     

     

     

     

     

     

     

     

     

     

     

     

    장산(壯山) 신돌석 장군(申乭石 將軍)의 한시(漢詩)

     

     

     

     

     

     

     

     

    登樓遊子却忘行(등루유자각망행)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可歎檀墟落木橫(가탄단허락목횡) 단군의 엣터가 쇠퇴함을 한탄 하네!

     

     

     

     

     

     

    男兒二七成何事(남아이칠성하사)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暫倚秋風感慨生(잠의추풍감개생)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신돌석(申乭石 1878~1908) 장군(將軍)이 1904년 지은 詩로, 호국을 위한 결기(決起)를 엿볼 수 있게한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제1차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하락 의병부대에서  중군장(中軍將)을 지낸 장군(당시 18세)이 27세 때인1904년 경에

    울진 망양정(蔚珍 望洋亭)에 올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로서, 이 시 단 한 편이 전해진다.

    이 후 1905년 장군이 경상북도 영덕에서 일으킨 의병부대인 "영릉의진(寧陵義陳)은 

    영일에서 삼척에 이르는 영동지역에서 약 3년 동안 일본군과 전투를 치뤘다.

    비록 농민들로 구성된 의병부대였  지만 당시 탁월한 전투력으로 연전 연승하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하여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리었는데,

    1908년 동절기로 접어들자 의병을 잠시 해산하고 봄을 기약하면서 영양 눌곡(訥谷)에 칩거하였는데, 

    장군의 현상금에 눈먼 金相烈(의병 부하) 형제에 의해 그해 12월 12일 죽임을 당하였다. 장군의 나이 30세다. 

    189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 났었는데,

    1908년 초 13도 창의군(十三道 倡義軍 ,총대장 이인영)이 한성탈환 작전을 벌이며 망우산까지 진격하였는데,

    당시 그 기밀이  누설   되어 일본군의 강한 저항으로 철군을 하게 되었다.

    당시 신돌석 장군 휘하의 300여 명 영릉의진도 참여 하였는데,

    신돌석 장군은 경상도 대표인 '교남창의대장'에 천거되었다.

    오늘날 십삼도 창의군을 기리는 기념탑은 서울 중랑구 망우동 망우산 공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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