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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정 문학촌(金裕貞文學村)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5. 10. 27. 05:45

    김유정 문학촌(金裕貞 文學村)

     

    이곳은 1930년대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 김유정 선생께서 태어나신 집터입니다.

    1908년 2월 12일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중퇴 후 귀향하여

    금병의숙을 연 뒤 야학을 통한 농촌계몽활동을 펼치는 한편 작가로서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 기간에 선생께서는 당시 한국농촌의 실상과 농민들의 삶, 농민들의 생생한 생활언어를 파악하여

    선생만의 독특한 언어감각과 해학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기초를 다졌습니다.

     

    선생이 남긴 30편 남짓한 작품 중 10여 편은 바로 이곳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들 작품의 등장인물들도 대개 당시의 실존인물들로 채워졌습니다.

    김유정 선생은 1937년 3월 29일 가난과 병고 속에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의 공식 문단 등단은 1935년 조선일보에 <소나기>, 조선중앙일보에 <노다지>를 통해서이지만,

    1933년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가 잡지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그의 작품활동 기간은 4~5년에 걸친 것으로 봅니다.

    <봄. 봄>, <동백꽃>, <소낙비>, <만무방>, <땡볕>, <따라지>등 농민들의 때로는 도회지 서민 등의 애환이 서린 작품들로

    우리 문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선생은 1994년 "3월의 문화인물" 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선생의 문화사적 업적을 알리고 그 문학 정신을 이어 펼치고자 운영 중인 "김유정 문학촌" 안에는

    복원된 생가, 전시관, 디딜방아, 외양간, 휴게정, 연못 등의 시설이 있으며,

    김유정 추모제, 세미나 등 각종 문학행사가 연중 개최되고 있습니다.

     

    =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3리 실레마을 =

     

     

     

     

     

     

     

     

     

     

     

     

     

     

     

     

     

     

     

     

     

     

     

     

     

     

     

     

     

     

     

     

     

     

     

     

     

     

     

     

    김유정, 그 쓸쓸하고 짧았던 생애

     

    - 말더듬이 멱설이에서 한국 문학의 대작가로 -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를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미친 사랑의 노래

     

    ...저에게 지금 단 하나의 願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에 기운이 다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미완성 장편소설 “생의 반려” 중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매일  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록주이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록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록주가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 본, 그나마 잘 낫으면 모르거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소설 “두꺼비” 중에서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우리는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를 통해 김유정과 박녹주의 그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향에서도 김유정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 12편의 작품이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박록주(朴綠珠, 1905~1979)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출생으로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송만갑(宋萬甲), 정정렬(丁貞烈), 유성준(劉成俊), 김정문(金正文)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박봉자(朴鳳子, 1909~1988)

     

    시인. 박용철의 동생이다. 잡지 <조광>에 '사랑의 편지'란 공동 제목으로 김유정과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유정으로부터 30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은 일절 없었다.

    차후 김유정과도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여 김유정을 결정적으로 절망케 한다.

     

     

     

     

     

    만무방과 따라지, 그리고 들병이들이 어우러진 강원도아리랑

     

    유난히 김유정의 작품에는 아리랑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강원도 아리랑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 가게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봉

    팔만 구암자, 재재 봉봉에

    아들딸 날라구 백일기도두 말게구

    타관 객지 나선 손님을 괄세두 마라

     

    논밭전토 쓸만한건 기름방울이 두둥실

    게집에 쓸만한건 적조간만 간다네

    아주까리 동백아 흐내지 마라

    산골 큰 애기 떼난봉 난다

    네가두 날만치나 생각을 한다면

    거리거리 노중에 열녀비가 슨다

     

    네팔자나 내팔자나 잘먹구 잘입구

    소라반자 미닫이 각장장판 샛별같은 놋요강

    원앙금침 잣모베개에 깔구덮구 잠자기는

    삶은 개다리 뒤틀리듯 뒤틀렸으니

    웅틀붕틀 멍석자리에 깊은 정이나 들이세

     

    -수필 '강원도 여성' 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증긔차는 가자고 왼고동 트는데

     

    정든님 품안고 낙누낙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낼갈지 모래갈지 내모르는데

     

    옥씨기 강낭이는 심어뭐하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 소설 '만무방' 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춘천아 봉의산아 잘있거라

    신연강 배타면 하직이라......

     

    - 소설 '안해' 중에서

     

     

     

     

     

    소설 “만무방”의 응칠이의 입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

    빚만 늘어나 소작마저도 어려워 야반도주를 하고,

    수수 일곱 되에 같은 농민끼리 살인도 마다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소설 “안해”에서는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내려는 따라지와

    만무방들의 모습을 애절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팔라당 팔라당 수갑사 댕기

    곤때도 안묻어 쥔애비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시에미 죽어선 춤추드니

    방아를 찔적엔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 문인끽연실, 중앙, 1936. 2에서

     

     

     

    닙히 푸르러 가시든 님이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잘살고 못살긴 내복분이요

    하이칼라 서방님만 아더주게유

     

    닙히 푸르러 가시든 님

    백설이 흩날려도 안오시네

     

    - 수필 '닙히 푸르러 가시든 님이' 중에서

     

     

     

     

    고통을 감싸는 웃음 , 해학

     

     

    해학은 작품 속의 만무방과 따라지들 같은 주인공들 보다 독자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순간 터진다.

    독자는 자신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내려다보며 마음껏 웃는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 왠지 모를 비애와 동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유정의 작품은 우리 전통 마당극이나 탈춤, 판소리 등에서 만나는 어조와

    해학적인 웃음처럼 우스운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대상의 결함과 비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풍자극이 대상과 대립하여 비꼬는 방법을 쓰는 반면에,

    김유정의 해학은 이런 맥을 같이 하면서도 대상을 한층 넓고 깊게 통찰하면서 동정적으로 감싸 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김유정의 재능은 감칠맛 나는 속어, 비어와 눙치는 어법으로 당시 농촌의 만무방과

    도시 따라지들의 슬픈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판소리처럼 들려주는 데 있다.

     

     

     

     

     

     

     

    봄봄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박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초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년이면 삼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 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하랴 싶어서 군소리 없이 꾸벅꾸벅 일만 해 왔다.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채서, "어참, 너 일 많이 했다.

    고만 장가들어라." 하고 살림도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이 아니냐.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그런 소리가 나올까 봐서 지레 펄펄뛰고 이 야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일하기에 싱겁기도 할 뿐더러 이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숙맥이 그걸 모르고 점순이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다리지 않았나.

    언젠가는 하도 갑갑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번 재 볼까 했다.

    마는 우리는 장인님 이 내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주 서 이야기도 한마디하는 법 없다.

    우물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에미 키두!'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 말락 밤낮 요모양이다.

    개 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뼉다귀가 움츠라 드나보다, 하고 내가 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니까.'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되먹은 긴지 이래도 막무가내니…….그래 내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모를 붓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또 싱겁다.

    이 벼가 자라서 점순이가 먹고 좀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심어서 뭘 하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불거지는 장인님의 아랫배(가 너무 먹는 걸 모르고 냇병이라나, 그 배)를 불리기 위하여 심곤 조금도 싶지 않다.

    "아이구 배야!"

    난 몰 붓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그대루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에 꼈던 벼 담긴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어 치며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나 배 아프면 고만 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 오른 풀 한 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쑥쑥 문대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논 가운데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 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더니, "넌 이 자식, 왜 또 이래 응?"

     

     

    五月의 산골작이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 섰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같다 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중략).......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 세상 사람을 보는듯하다 (중략)......

     

    그리고 산골에는 잔디도 좋다, 산 비알에 포곤히 깔린 잔디는 제물로 침대가 된다,

    그 우에 바둑이와 가치 벌룽 자빠져서 묵상하는 자미도 좋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우뚝우뚝 섯는 모조리 푸른 산이매, 잡음 하나 들리지 안는다,

    이런 산속에 누어 생각하자면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느끼게 된다

    머리 우로 날아드는 새들도 각가지다,

     

    어떤 놈은 밤 나무가지에 앉어서 한 다리를 반짝 들고는 길음한 꽁지를 훼훼 두르며 삐쭉! 삐쭉! 이렇게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이번에는 하얀 새가 뺑! 하고 나라와 앉어서는 고개를 까땍까땍 하다가도루 뺑! 하고 다라난다,

    혹은 나무줄기를 쪼며 돌아다니는 딱따구리도 있고 그러나 떼를 지어 푸른 가지에서 유희를 하면서 짖어귀는 꾀꼬리도 몹시귀엽다,

     

    산골에는 초목의 내음새까지도 특수하다,

    더욱이 새로 튼 잎이 한창 퍼드러질 임시하야 바람에 풍기는 그 향취는 일필로 형용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개운한, 그리고 졸음을 청하는 듯한 그런 나른한 향기다, 일종의 선정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짙은 향기다

    뻐꾹이도 이 내음새에는 민감한 모양이다, 이때로부터 하나 둘 울기시작한다.

    한 해만에 뻐꾹이의 울음을 처음 드를 적만치 반가운 일은 없다 (중략) 

     

     

     

     

     

     

     

     

     

     

     

     

     

    봄봄(1935년 “조광” 12월호에 발표된 김유정의 단편소설)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박 일곱달.

    장인님은 내가 성례를 시켜달라고하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점순이가 안죽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말이다.

    이래서 나는 애초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어저께 모를 붓다말고 논둑으로 기어올라 “배가 좀 아파서유!”하고

    풀우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웅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아, 일 허다 말면 누굴 망해 놓을 속셈이냐. 이 대갈릴 까놀 자식?”

    구장님에게 가서 성례를 시켜 달라 중재도 요청해 보았지만 소용없다.

    회전밭을 혼자 갈고 있을 때 점심을 이고 왔다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하고 쫑알거렸던 점순이가

    오늘 아침에도 되우 쫑알거리며 바보라고 성을 냈다.

    밥을 먹은 뒤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갈랴하다 바같마당 공석 우에 드러누었다.

    이를 본 장인님은 지게작대기로 나를 내리갈겼고 나는 장인님을 넝알로 굴려버렸다.

    “부려만 먹구 왜 성례 안하지유!” 장인님이 내 바지가랭이를 담박 웅켜잡고 매달렸다.

    땅바닥에 쓰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나도 장인님의 바짓가랑이를 꽉 웅키고 잡아 나꿨다.

    장모님과 점순이가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장모님은 제 남편이니까 역성을 할는지도 모르나,

    점순이는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하고

    내 귀를 뒤로 잡아댕기며 마냥 우는 것이 아니냐.

    그만 여기에 기운이 탁 꺽이어 나는 얼빠진 등신이 되고 말었다.

     

     

     

    김유정(金裕貞)

     

     

    김유정(金裕貞)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를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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