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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주삼릉(坡州三陵) -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5. 10. 29. 22:30

     

    파주삼릉(坡州三陵) -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파주삼릉(坡州三陵)은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을 말하는데.

    왕릉군의 앞머리를 따서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린다.

    공릉(恭陵)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추존) 한씨(韓氏)의 능이다.

    순릉(順陵)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의 능이다.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추존)과

    그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의 능이다.

    파주삼릉(坡州三陵)은 1070년 5월 26일 사적 제205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봉일천리) =

     

     

     

     

     

     

     

     

     

     

     

     

     

     

     

     

    공릉(恭陵)

     

    공릉(恭陵)은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이다.

    그녀가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간략히 조영하였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으며, 일반적으로 왕릉에 세워지는 망주석도 생략되었다.

    그러나 석양과 석호가 호위하고 있는 봉분은 그 크기가 크며 혼유석과 장명등, 문석인과 석마가 놓여 있다.

    석물은 조선시대 초기 형태인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석양은 네 발을 모으고 곡장(曲墻)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호와 같이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

    이 석양은 얼굴과 뿔은 비교적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몸통은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한편 석호는 석양과는 달리 앉은 자세로 되어 있다. 봉분 뒤 좌우에 1쌍이 배치되어 있는데 위엄이 있고

    용맹한 호랑이라기보다는 귀여운 고양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곡장 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악귀를 쫓는 벽사의 기능을 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가 ㄱ자로 꺾인 점이 특징적이다.

     

    장순왕후가 1461년(세조 7) 12월 5일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세조는 이듬해 2월 17일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2월 25일 파주 남쪽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1470년(성종 1) 1월 22일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1월 11일에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그러나 왕후로 추존된 후에도 세자빈묘로 조영한 능에 더 이상의 상설을 하지는 않았다.

     

     

     

     

    순릉(順陵) 

     

    순릉(順陵)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비 공혜왕후의 단릉이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이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정자각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쓰여 있고,

    1817년(순조 17)에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릉의 금천교가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현재의 진입 모습은 변형된 것이다.

    공혜왕후(恭惠王后)는 1474년(성종 5) 4월 15일 승하하여,

    시호를 공혜, 능호를 순릉이라 하고 같은 해 6월 7일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영릉(永陵)

     

    영릉(永陵)은 영조의 큰 아들 진종(眞宗, 1719~1728)과 비 효순왕후(孝純王后 趙氏, 1715~1751)의 쌍능이다.

    진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가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능 또한 세자묘의 예를 따라 조영되었다가 훗날 왕릉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되었고, 봉분 주위에는 석호와 석양, 문석인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석인은 조선 전기의 능인 공릉에 비해 다소 마르고 작은 편이다.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문석인과 함께 중계(中階)에 배치된 석마 역시 조선 전기와는 다른 형태로 겸손하게 머리를 구부린 모습을 하고 있다.

    전기의 석마는 둔중한 모습이지만 영릉의 석마는 전기의 것에 비해서는 살이 약간 빠지고 날렵한 모습이다.

    하계는 생략되었으며 무석인 역시 없다.

     

    능의 역사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어린 나이의 세자가 승하하자 영조는 그 해 12월 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이듬해인 1729년(영조 5) 1월 26일 현재의 위치인 순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예장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1751년(영조 27)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 1월 22일 효장세자묘 왼쪽에 안장하였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효장세자의 밑으로 입적시켰다가 그가 왕위에 오르자,

    즉위년인 1776년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능 또한 영릉으로 추봉되었다.

     

     

     

     

    파주삼릉 재실(坡州三陵 齋室)

     

    파주의 공릉, 순릉, 영릉(파주 삼릉)의 재실(齋室).

    재실은 앞면 6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행랑채,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다.

    재실은 능을 관리하거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재각·재궁이라고도 한다.

     

     

     

     

     

     

     

     

     

     

     

     

     

     

     

     

     

     

     

     

    아아! 나는 덕이 부족하여 오로지 세자만 믿었다.

    성품도 이와 같아서 이 나라에 만세의 복이 되기를 바랐다.

    어찌 10세의 나이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종사를 생각하니 애통함을 억누르기가 더욱 어렵다.

     

    영조가 아들 진정을 위해 지은 지문(誌文) 중에서...

    영조실록 1729년(영조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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