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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 선생(丁若鏞 先生)의 묘(墓)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5. 11. 14. 21:06

     정약용 선생(丁若鏞 先生)의 묘(墓)

     

     

     

    경기도기념물 제7호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

     

     

    조선 시대의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 ~ 1836)의 묘로서 부인 풍산 홍씨(豊山洪氏)와의 합장(合葬) 묘이다.

     

     

    선생의 본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며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냈고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 고산 윤선도, 공제 윤두서의 후손)로

    영종(英宗)38년(1762) 6월 16일에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馬峴里,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15세(영조52, 1776)에 풍산 홍씨(豊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서 머물 때 성호(星湖) 이선생 익(李先生 瀷)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이 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22세(정조7년,1783)에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28세(정조13, 1789)

    문과(文科) 에 급제하여 첫 벼슬인 희릉직장(禧陵直長)에 제수되었다.

    이어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郎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 여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둘째형 약전(若詮)이 연루되어

    반대파의 공격이 심해지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5개월 만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정사년(정조21, 1797) 6월에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천주교 관계 전말을 고백하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물러났고

    황해도 곡산(谷山) 도호부사(都護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기미년(정조23,  1799)에 내직으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천주교와 관련하여 모함하는 상소가 잇따르자 경신년(정조 24, 1800)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해 6월 정조대왕(正조大王)의 갑작스런 승하로 선생에게 화(禍)가 일어났다.

     

    신유년(순조1, 1801) 봄에 사간원에서 서교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정약종․이가환․이승훈 등은 사형당하고

    얼마 뒤에 선생은 장기현(長鬐縣)으로 형 약전 (若詮)은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황 사영(黃嗣永) 백서(帛書)사건으로 인하여 선생은 강진현(康津縣)으로, 형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이배되었다.

     

    무진년(순조8, 1808) 봄에 강진 도암면(道岩面) 만덕리(萬德里) 다산(茶山)의 산 밑에 있는

    윤단(尹慱)의 산정(山亭, 현 다산초당)으로 이주하여 저술작업에 몰두 하였다.

    이 시기에 경세학(經世學)과 더불어 선생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 (經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 졌으며

    필생의 역작인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도 이 시기에 초고(草稿)가 이루어졌다.

    황상(黃裳) ․이강회(李綱會)를 비롯한 18제자를 길렀으며,

    혜장(惠)․초의(艸衣)와 같은 고승(高僧)들과도 귀중한 인연을 맺었다.

      

    무인년(순조18, 1818) 가을에 57세의 나이로 해배되어 고향 마현리(馬峴里)로 돌아 왔다.

    이후에도 저술을 계속하여 미완이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경세유표를 보완했으며,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등을 저술했다.

     

    병신년(헌종2, 1836) 회혼일(回婚日)인 2월 22일 75세의 일기로 이곳 여유당(與猶堂) 자택의 정침(正寢)에서 서거 (逝去)하였고 

    4월 1일 선생의 유언에 따라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安葬)되었다.

     

    사후 74년만인 1910년(융희4) 7월 18일 조정에서는 선생을 정이품(正二品)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으로 추증(追贈)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壙中本) ,창작연도/발표연도 1822년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회갑이 되던 해 1822년,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묘지명(墓誌銘)이라는 문체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集中本)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壙中本)이 있으며,

    아래 명(銘)은 광중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글이다.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조(英祖) 임오년(壬午年, 1762년)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한문을 좋아했다.

    22세(정조 7, 1783년)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儢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 13, 1789년)에 갑과(甲科)에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년, 1795년)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郎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으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년, 1776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 23년, 1799년)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 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경신년(정조24년, 1800년) 6월달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 받았다. 이달에 정조대왕이 승하(昇遐)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15세(영조 52년, 1776년)에 풍산홍씨(豊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년, 1787년)이후 4~5년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정조15년, 1791년)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 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년)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년)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엄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으로 정배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에 정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 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당하였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 작처(酌處)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순조3, 1803년)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순조10년, 1810년)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이 명원(鳴寃)으로 방축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순조18년, 1818년) 가을에 비로서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시(詩), 서(書), 예(藝), 악(樂), 역(易), 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역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 안옥(按獄), 무비(武備), 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 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 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곳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대왕의 총애와 가장(嘉奘)이 동열(同列)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 내구마(內廐馬), 문피(文皮)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희가 잇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陣)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 주셨다.

    항상 규장각(奎章閣), 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셨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순조22년, 1822년)을 다시 만나니 이른바 회갑으로 아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않은 일을 씻어 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 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대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쳣다.

    고조의 휘(諱)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였다.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遊)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근밀에 들어 갔네/ 荷主之寵 入居宥密(하주지총 입거유밀)

    임금의 복심되어 조석으로 모셨도다./ 爲之腹心 朝夕以昵(위지복심 조석이닐)

    하늘의 총애를 입어 우충이 열리었네./ 荷天之寵 牖其愚衷(하천지총 유기우충)

    육경을 정연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精硏六經 妙解微通(정연륙경 묘해미통)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너를 옥성시켰네./ 憸人旣張 天用玉汝(섬인기장 천용옥여)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니련다./ 斂而藏之 將用矯矯然遐擧(렴이장지 장용교교연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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