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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모노레일과 땅끝전망대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6. 2. 5. 05:22
땅끝 모노레일과 땅끝전망대
남해의 해안절경과 쪽빛바다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땅끝 모노레일은
국토의 최남단인 땅끝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국토순례 시발지인 땅끝을 더욱 생동감 있게 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갈두산전망대까지 걸어서 쉽게 갈 수 없었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2005년 12월19일 395m의 모노레일을 운행하고 있다.
땅끝 유래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21초의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국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全圖)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千里),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리(二千里)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三千里 錦繡江山)'이라고 하였다.
오래 전 대륙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우리민족이 이곳에서 발을 멈추고 한겨레를 이루니,
역사 이래 이곳은 동아시아 3국 문화의 이동로이자 해양문화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땅끝전망대 현황
위치: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1158-5
용도: 관광휴게시설
대지면적: 2,560㎡, 건축면적: 385.27㎡, 건축연면적: 999.91㎡, 건폐율 15.04㎡, 용적율: 34.67㎡.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규모: 지하 1층, 지상 9층, 최고높이 39.5m
외부마감: THK 0.7 티타늄아연관 +THK 30 화강석버너구이 +THK 24 복층유리
설계기간: 2000.8.23~2000.11.10.
공사기간: 2001.1.6~2002.1.31.
갈두산 봉수대(葛頭山 烽燧臺)
갈두산 봉수대는 육지의 최남단 갈두산 사자봉 정상에 위치하여 왔다.
정상에 축조된 봉수대의 원형은 파괴되었으나 1~2단 정도의 석렬(石列) 흔적만 주위에 흩어져 있는
석재군(石材群)을 통해 원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땅끝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봉수대를 복원했다.
주위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막돌로 쌓은 연대(烟臺)는 직경 15m내외의 원형 축조물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의하면 갈두산 봉수는 조선초부터 존속한 것으로 보이며
동쪽으로 북일면 좌곡산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화산면 관두산 봉수에 응하였던 봉수지다.
갈두산 봉수대(葛頭山 烽燧臺)
아름다운 봉수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땅끝전망대 주변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이곳이 조선시대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갈두산 봉수대는 육지의 최남단 갈두산(葛頭山, 해발 156.2m)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烽燧臺)이다.
이곳 갈두산 봉수대는 멀리 서남해로부터 쳐들어오는 왜구의 변란을 가장 먼저 알리던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
동쪽으로 강진현(康津縣) 좌곡산(佐谷山, 현 북일면 봉태산),
서쪽으로 해진군(海珍郡) 화산(花山, 현 현산면 관두산[烽台山])에 준하여 설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조선초에 설치되어 고종(高宗) 때 폐지(廢止)된 것으로 보인다.
갈두산 봉수는 광무(光武)10년(1906) 영암군(靈巖郡)에 속하였던 송지면(松旨面)이
해남군(海南郡)에 이속(移屬)됨에 따라 편입된 지역이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朝鮮時代) 세종(世宗)의 4군6진 개척과 더불어 확립되었다.
낮에는 연기(煙氣), 밤에는 횃불로써 국가의 급한 소식을 왕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지역에도 알려
적(敵)의 침략(侵略)에 대비했던 군사통신방법(軍事通信方法)으로 그 수에 따라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평상시에는 1개의 홰,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범하면 4홰, 접전하면 5홰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만약에 적이 침입했을 때 안개, 구름, 비바람으로 인하여 봉수가 전달되지 않을 경우에는
화포(火咆)나 각성(角聲) 또는 기(旗)로써 알리거나 봉수군(熢燧軍)이 직접 달려가 알렸다.
갈두산 봉수대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던 것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막돌로 쌓아 복원하였으며,
봉수의 직경은 4.5m 내외이다. 하부는 바위돌을 사용하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꽃섬과 전복양식장
땅 끝 탑 (손광은)
이 곳은 우리나라 맨 끝의 땅
갈두리 사자봉 땅끝에 서서
길손이여
土末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먼 섬 자락에 아슬한 漁龍島(어룡도) 白日島(백일도) 黑日島(흑일도) 塘仁島(당인도)
長久島(장구도) 甫吉島(보길도) 蘆花島(노화도) 漢拏山(한라산) 까지
水墨(수묵)처럼 스며가는 情(정)
한 가슴 벅찬 마음 먼 발치로
白頭(백두)에서 土末(토말, 땅끝)까지 손을 흔들게
數千年(수천년) 지켜온 땅끝에 서서
數萬年(수만년) 지켜갈 땅끝에 서서
꽃밭에 바람일 듯 손을 흔들게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내게
땅끝 유래
이곳 땅끝은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가장 끝점이 북위 34도 17분 21초에 해당한다.
땅끝에 위치한 갈두마을은 칡갈(葛)자에 머리두(頭)를 써서 갈두리(葛頭里)라 부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만국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全圖)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千里),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리(二千里)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三千里 錦繡江山)"이라고 하였다.
윤두서 초상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며 1987년 12월 26일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었다.
지본담채이며, 가로 20.5cm, 세로 38.5cm이다.
1710년(숙종 36년) 제작되었고 래남에 거주하는 후손 윤형식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년~1715년)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자는 효언, 호는 공재·종애, 본관은 해남(海南).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외할아버지이자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특히 인물 · 동식물 등의 그림에 뛰어났다.
장남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溶)도 화업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다.
겸재 정선(鄭敾) · 현재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이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1712년 이후 만년에는 해남 연동(蓮洞)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작품으로 노승도, 산수도, 자화상 등이 있다.
갈두산(155m) 땅끝전망대에서 본 땅끝마을(송호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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