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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흥 쌍충사(高興 雙忠祠) - 전라남도 기념물 제128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2. 7. 06:37

    고흥 쌍충사(高興 雙忠祠) - 전라남도 기념물 제128호


    쌍충사는 임진왜란 이전 남해안에 침입한 왜적을 막다가 손죽도(巽竹島)에서 전사한 충렬공 이대원(忠烈公 李大源, 1566~1587)과

    임진왜란 중에 큰 공을 세우다 전사한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 ,1543~1592)을 배향한 사우다.

    원래 선조 20년(1587) 2월 20일 녹도만호(鹿島萬戶)를 역임한 이대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녹도만호로 있다 순직한 정운과 함께 초가집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오다

    숙종 때 와서 사우를 세우고 쌍충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1946년 현 사당을 세우고 1957년에 강당이 세워졌다.

    1969년과 1970년에 건물 일부를 신축, 보수하여 현재 사당, 강당, 내삼문, 관리사 등 4동의 건물이 있으며 4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대원은 1587년(선조 20) 녹도만호로서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렸고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인근 주민에게 향사토록 하였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인 이대원 묘당이다.

    정운은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1591년 녹도만호로 부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옥포, 당포, 한산해전 등에서 선봉장으로서 전과를 올리고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청하여 1592년 그 위패를 합향하였다.


    =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202 =

     



























    소록대교(小鹿大橋)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고흥반도)에서 소록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거금도 연륙교라고도 불린다.

    길이 1,160m, 왕복 2차로의 다리로 연결도로를 포함하면 3,460m에 이른다.

    12개 교각에 중앙부분에 주탑 2개가 케이블로 연결된 형태의 현수교로,

    왕복 2차선의 도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도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전라남도가 2001년 6월 착공해 2008년 6월 완공하였으나 섬 안의 연결도로 공사가 지연되어 2009년 3월에야 완전 개통되었다.

    이 대교의 개통으로 기존 해상로 통행만 가능했던 소록도와 육지간을 육로로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교량 상판을 매단 케이블을 지탱하는 높이 87.5m의 주탑 2개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형상이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한센병 환자와 병원 직원, 자원봉사자와 주민들이 살고 있다.











    녹도진성지


    성은 행정구역상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이며 지리적으로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남쪽으로는 소록도와 거금도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득량만이 위치하고 있다.

    성은 158.7m의 비교적 낮은 야산의 남쪽사면에서 해안선까지 이어지는 평산성으로 평면형태는 반원형에 가깝다.

    체성은 단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는 성내에 대부분 건물이 들어 서 있고

    작으로 훼손되어 전체적인 위치나 형태는 파악할 수 없다.

    단지 일부 남아있는 체성과 문지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팽나무, 그리고 남문 문주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확인될 뿐이다.

    시설물은 문지 4개소와 군관청, 객사터, 집무실, 내아, 선창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물들은 모두 훼손되어 사라지고 단지 그 위치만을 파악할 수 있다.



    녹도진성

    녹도진성은 성종 21년(1490) 10월에 축조된 만호진성(萬戶鎭城)이다.

    녹도진(도양읍 봉암리)의 최초의 설진년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선초에 설진됐음은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녹도진은 전라좌도 도만호진(全羅左道 都萬戶鎭)인 여도관하(呂島管下)에

    내례(內禮), 돌산(突山), 축두(築頭), 6수, 별선(別船) 2수, 군(軍) 483인, 초공(梢工) 4인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는 방어와 수색을 위하여 수군첨절제사나 수군만호들은 항상 병선을 이끌고

    해상을 왕래하였고 병선의 유박처(留泊處)로 지정된 포소(浦所)를 영(營) 진(鎭)으로 삼고는 있었으나

    여기에는 군량과 군기를 쌓아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울러 무군병선(無軍兵船)이 있어서 유사시 하번선군(下番船軍)이 집결하는 장소였다.

    또 평상시에는 해상작전을 하는 병선의 기항지인 동시에 보급기지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군은 병선에 승선하여 해상에서 왜적을 막아야 했다.

    이러한 수군의 장재선상수어(長在船上守禦)의 원칙은 성종 15년(1484)경까지 지속되었다.

    세조(世祖) 3년(1457) 1월에 축두포가 혁파됨에 따라 선군을 발포진과 함께 분속받으며

    제포(諸浦)의 만호(萬戶)․첨사유진처(僉使留鎭處)에 대한 축성이 논의 된 것은 성종 15년(1484) 10월의 일이다.

    당시 제포에 대한 축성 논의는 조숙기(曺淑沂)의 주도하에 여러 차례 거듭되었다.

    논란의 요지는 대략 찬․반 양론이 있었으나 수영(水營)을 설치한 본의가 수상에서 적을 방어키 위한 것이니

    군량․군기가 많아져서 병선에 적재하지 못하고 있어 포구의 요해를 가려 축성하고

    아울러 당시에 초사(草舍)를 짓고 기거하는 첨사 만호들의 처지를 인정함으로써

    전략적으로 수비입보(守備入保)하여 원병을 기다리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이에 따라 성종 16년(1485) 3월 홍응(洪應)으로 하여금 순심(巡審)케 한 결과

    경상도와 전라좌수영 관하의 설보대상처(設堡對象處) 16곳을 선정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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