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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태우 의사, 한항길 선생 흉상(안양 자유공원)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6. 4. 5. 05:31

    원태우 의사, 한항길 선생 흉상(안양 자유공원)




    원태우 의사(元泰祐 義士)


    원태우 의사께서는 1882년 3월 4일 과천면 안양리 642번지(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642번지)에서 출생 하셨다.

    원의사께서는 1905년 11월 22일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수원에 사냥을 갔다가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날 때 혼자의 몸으로 돌을 던져 큰 상처를 입히고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이 의거는 민간 항일운동의 효시가 된 거사로써 당시 대판매일신문, 대한매일신문, 동경매일신문 등의 언론은 물론이요.

    일본이 제작한 “일로전쟁화보”와 “속음청사”에도 그 내용이 수록된 일대 사건이었다.

    원의사께서는 1906년 1월2 4일자로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루었다.

    당시의 고문으로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지내신 원의사께서는 69세의 일기로

    수푸루지(지금의 안양 비산동)에서 타계(1950년 6월 25일)하셨다.

    그후 40년이 지난 1990년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항길선생(韓恒吉先生)


    한항길선생께서는 1897년 7월 18일 과천군 상서면 호계리 289번지(현재의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에서 출생하셨다.

    선생께서는 1919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 2학년 재학생의 몸으로 3.1운동에 참가하여 만세를 외쳤고

    이어 시흥, 안양, 군포지역의 통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시는 한편 3월 5일 서울역에서 거행되었던

    두번째 독립시위운동에 가담하셨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3여년간의 옥고를 치르셨다.

    이후 선생께서는 경성보인고등학교 교사, 경성매일신문, 부산국제신보사의 기자생활을 거쳐

    광복과 함께 조국의 앞날은 기술진흥과 후진양성에 있다는 신념으로 안양직물주식회사, 소사공업고등기술학교,

    부천전문대학교등을 설립하시고 공업입국을 위한 기술인력 배양에 심혈을 기울이시다가

    1973년 5월 8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배달민족의 혼

     

    귀 기울여 다시 들어보라

    1919년 3월 1일

    흰 옷 입은 백성들의 만세 소리를

     

    마음 깊이 되 새겨보라

    배달민족의 가슴에 사무쳤던

    조국독립의 숭고한 뜻을

     

    삼천리 금수강산 뒤 덮었던

    태극기의 물결이여

    삼천리 방방곡곡 메아리쳤던

    대한독립만세

     

    나라 잃고 말 빼앗겼던 울분을

    가장 먼저 터뜨린 한국인이

    바로 우리 안양사람이었음은

    그 얼마나 당당하고 자랑스러운가

     

    육영의 꿈나무 심고

    공업입국의 길 앞장서 간 한국인이

    바로 우리 안양사람이었음은

    그 또한 얼마나 보람차고 흐믓한가

     

    여기 발길 멈추고

    생각에 잠긴 그대들이여

    저 하늘에 지금도

    조국의 앞날을 비추는 두 별이 빛나거니

     

    이제 그대들의 가슴 속에

    그 별빛 고이 간직하고

    나보다는 우리를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나라사랑의 횃불로 밝혀야 하리라


    1995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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