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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치원 유적지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6. 5. 12. 05:30

    최치원 유적지


    신라 말에 중국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며, 유명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에서 보다 중국에서 더 이름을 날렸던 최치원!
    중국보다 조국 신라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려고 귀국하였지만 골품제도라는 높은 장벽에 의해

    그의 웅지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한많은 세월을 술과 시, 여행을 통해 울분을 삭혔던 최치원!
    한국역사에서도 더물게 보는 천재이자 기인이며 거의 죽음조차도 신비한 전설로 남아있는 도인(道人)!

     그 최치원 선생이 지금 부산 누리마루가 있는 해운대 동백섬에 와서 바닷가의 돌에 '해운대(海雲臺)'라 글을 새기고

    술 한잔에 시 한수를 지으며 노래불렀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의 호가 해운('海雲)', 고운(孤雲)이었다.

     '바다 구름', '외로운 구름'낭만적이고 쓸쓸함이 베여있는 최치원 선생의 호인 것이다.

    그래서 '해운대'는  최치원 선생이 놀다 갔던 곳이며, 동백섬과 해운대각석은 부산시 기념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 '해운대'의 정확한 위치는 해운대 해수욕장 서쪽 끝 조선비치호텔이 있는 동백섬

    그 중에서도 오솔길따라 5분쯤 올라가면 넓고 평평한 곳이 나온다.
    '대(臺)'는 멀리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평지를 말하거니와

    그 동백섬의 정상부근의 넓고 평평한 곳이 '해운대'의 정확한 위치인 것이다.




















    고운 최치원선생 약전(孤雲 崔致遠先生 略傳)


    선생은 신라 헌안왕(新羅 憲安王) 첫해 서기 857년 경주(慶州) 남천(南川)가에 나서 12세에 당(唐-中國)나라로 유학을 가셨다.

    18세에 과거(科擧)에 등과(登科)하여 율수현위(慄水縣尉)가 되고 25세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중원(中原) 문단을 흔들고

    시어사(侍御史) 벼슬과 자금어대(紫金魚袋)의 하사를 받아 외국사람으로서 젋은 나이에  큰 영광과 기염들 통했다.
    28세에 고국으로 돌아와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질투를 입어 태인(泰仁), 함양(咸陽), 서산(瑞山) 등

    여러 고을 태수(太守)로 나돌면서도 명문(名文)과 명시(名詩)를 많이 남기셨다.
    37세에 정치의 급선무(急先務)를 아뢰어 아찬(阿飡)의 직위를 얻었으나 기울어가는 국운(國運)을 구할길 없어 벼슬을 버리고

    40세로 방랑(放浪)의 몸이되어 전국 여러곳을 다니시다가 마지막에는 처자(妻子)를 이끌고

    가야산(伽倻山)-합천(陜川)으로 들어가 갓과 신을 숲속에 남긴채 가신곳을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뒷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해동유학(海東儒學)의 시조(始祖)로 받들고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내리시니 그 도덕과 학문을 숭상해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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