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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황산 표충사(天皇山 表忠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6. 5. 18. 23:30

    천황산 표충사(天皇山 表忠寺)


    표충사는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 원년(654) 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지금의 극락암(極樂庵)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중,

    어느 날 아침 재약산 기슭을 바라보니 대밭 속에서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떠올랐다.

    원효는 곧바로 하산하여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 절의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고 하였다.

    지금도 그 흔적이 절 뒤 대밭 속에 남아있다.

    이후 흥덕왕(興德王) 4년(829)에는 왕의 셋째 왕자가 풍병(風病)으로 고생할 때

    이곳의 신비스런 우물(靈井藥水)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으므로 절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로 고쳤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에 혜징화상(慧澄和尙)이 중건하였다.

    지금의 표충사(表忠寺)란 명칭은 헌종 5년(1839)에 사명대사의 8세 법손(法孫)인 천유선사(天有禪師)가

    임진왜란 때 구국을 위해 헌신한 사명(四溟), 청허(淸虛), 기허(騎虛) 대사 등을 기리고자

    밀양군 무안면 표충사(表忠祠) 사당에 있던 세 승려의 진영(眞影)과 위패(位牌)를 옮겨와 모시면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절의 명칭인 표충사란 불교와 유교의 이념이 통합된 뜻을 담고 있다.

    이 절의 독특한 유래와 연혁만큼이나 이곳에는 국보와 보물 및 다양한 지방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다.


    = 경남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구천리) 표충사 =








     

    표충서원


      이 서원은 본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 사명, 기허당 등 세분 大師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원래는 무안면 중산리 삼강동에 표충사라는 사당으로 세워져 있던 것을 1839년(헌종 5)에 옛 영정사(靈井寺) 터인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표충서원으로  편액을 걸었다. 이 때 절 이름도 표충사로 고쳐졌다.

      서원은 전통 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대유학자인 선현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표충서원 역시 건물의 구성과 배치뿐만 아니라 祭禮 절차도 일반 서원과 같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고, 사동도 佛殿으로 바뀌었다.

    1926년에는 대화재가 발생해 대광전과 세 대사의 영정을 모시던 영당 등이 불탔다.

    이듬해에 중건할 때 대광전과 함께 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되어 영당에 모셨던 세 대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과 서원의 사당이 나란히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승려들의 요구에 따라,

    1971년에 표충서원을 경내 서편에 위치한 팔상전 자리로 옮기고 본래의 서원건물을 팔상전으로 하였다.

    따라서 지금은 당시의 서원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진다.

    이 표충서원은 조선시대 이후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보여주는 특이한 사례이다.







     

    표충사 사천왕문(表忠寺 四天王門)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목조사천왕상과 함께 현대의 불모(佛母)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 三層石塔) -보물 제467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추정되는 높이 7.7m의 3층 석탑이다.

    1995년의 해체 보수 때에 나온 많은 유물은 탑과 표충사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탑은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고,

    지붕돌의 주름도 한 개가 줄어든 네 개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여러 장식과 함께, 아직도 찰주가 높이 솟아 있고,

    삼층의 지붕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층의 지붕돌에는 근년의 것이긴 하지만, 2개의 풍탁이 달려 있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늦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균형 있는 전체적 비례와 우아한 모습은 간은 시기의 석탑 중에서도 뛰어나다.





     

    표충사 팔상전(表忠寺 八相殿)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일반적으로 사찰(寺刹)에서의 팔상전(八相殿)은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가지 모습 즉, 하천(下天), 탁태(託胎), 강탄(降誕), 출가(出家), 강마(降魔),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입열반(入涅槃)으로 나누어 표현한 탱화(幀畵)와 존상(尊像)을 모신 법당(法堂)을 말한다.
    본래 표충사(表忠寺)의 팔상전은 철종 5년(1854년)에 당시 주지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지장전 구지(地藏殿 舊址 : 현재 종무소 자리)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팔상전은 창건 연대가 명확하지는 않다.
    현재의 팔상전은 헌종 5년(1839년) 봄에 사명대사(四溟大師)의 8세 법손(法孫)인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가

    무안면 영취산(靈鷲山)에 있던 표충사(表忠祠 : 서산, 송운, 기허 등 3대사를 모신 사당)을

    당시 영정사(靈井寺)였던 이곳으로 옮겨오며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꿀 당시에는 관음전(觀音殿)이 였던 곳인데,

    이 곳에다 3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扁額)하고 향사(享祀)를 받들어 왔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만아니라

    더구나 대광전(大光殿)과 나란히 불제자(佛第子)의 유상(遺像)을 모신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부처님에 대하여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표충서원이 있던 자리에 팔상전을 옮기고,

    본래 팔상전이 있던 자리(현, 종무소)에는 표충서원 옮겨 1992년 복원사업이 완료될 때까지 존치(存置)했었다.
    표충사 팔상전(表忠寺 八相殿)은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표충사 대광전(表忠寺 大光殿)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대광전은 표충사의 중심 불전(佛殿)으로 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藥師佛)을,

    서쪽에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각각 봉안하고 있다.

    신라 시대에 처음지어졌다고 하지만, 전란 등으로 불타 버린 것을 1929년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간 3칸의 단층 팔작(八作) 다포계(多包系) 양식이다.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과 추녀의 장식들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과 기둥 위 장식들의 간격이 동일하게 배치되어 균형미를 잘 살리고 있다.

    건물 네 귀퉁이에는 추녀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4개의 기둥(活柱)을 따로 두어 추녀를 받치고 있다.

    4개의 기둥 중 앞쪽의 기둥은 팔각형인데 반해 뒤쪽의 기둥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은 매우 특이하다.

    건물을 받쳐주는 받침돌(基壇石)과 주춧돌(礎石)은 잘 다듬은 돌로 되어 있어 건물의 품위를 높여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화려하고 섬세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표충사 명부전(表忠寺 冥府殿)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143호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幽明界)를 사찰 속에 옮겨 놓은 법당이다.

    자장보살(地藏菩薩)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으리 고도 한다.

    표충사 경내에 관음전과 나란히 있는 이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에 이미 있었던 것 같으며, 당시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광해군대에 복고 주지 도한(道閑) 등에 의해 다시 곧 바로 복구가 이루어진다.

    헌종대에는 월파선사(月坡禪師)가 명부전 자리를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삼대사(三大師)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지금 전하는 것은 1929년에 복원한 것을 1989년에 개축한 것이다.










     

    표충사 만일루(表忠寺 萬日樓)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142호


    이 H자형의 독특한 건물은 1860년 [철종11] 당시 방장(方丈 월암상인(月庵上人)이 조성한 것이다.

    48칸의 선실을 108평의 부지에 지어 동림고사(東林古社)라 이름하였는데,

    혜원법사(慧遠法師)의 유풍을 받드는 뜻을 담고 있고 불교위 48원(願)과 108번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곳은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대중들의 정진 장소로 쓰였으며,

    무량수각(無量壽閣) 혹은 서래각(西來閣)으로 편액되어 선방(禪房)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건을 계기로 현판도 영남제일선원(嶺南第一禪院)으로 새로 걸었다.

    이 곳은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宗正)을 역임한 효봉대종사께서 말년을 보내시고 열반한 곳이기도 한다.

















     

    표충사 수충루(表忠寺 酬忠樓)


    표충사의 정문 역할을 하는 문으로 2층 누각에 1층은 장초석 위에 기둥이 놓인 삼문의 형태이고, 2층은 누마루가 깔린 형태이다.

    수충루를 정면에서 보면 중앙에 '표충사(表忠寺)'라는 사명을 편액으로 붙였고, 그 좌우에 작은 편액이 따로 붙어 있다.

    왼쪽에 있는 ‘천황제일루(天皇第一樓)’는 절 배후의 천황산(天皇山, 1189m)에 연유한 것이며,

    오른쪽의 ‘수충루(酬忠樓)’는 호국성사(護國聖師) 사명당(四溟堂)의 충혼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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