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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고기의 설화, 운제산 오어사(雲梯山 吾魚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6. 5. 27. 05:34

    물고기의 설화, 운제산 오어사(雲梯山 吾魚寺)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1) 때 창건하여 항사사(恒沙寺)라 하였다.

    옛날 오어사에서 원효 대사와 혜공 대사가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둘이서 계곡 상류에서 놀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서로 법력을 시험하여 보고자 하여,

    고기를 낚아 다시 살리는 재주를 겨루었다.

    그런데 둘의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좀체 승부가 나지 않다가 딱 1마리 차이로 승부가 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중 고기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주장하였다고 한 데서

    '나 오(吾)'와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기를 놔준 곳이 지금 오어사 앞에 있는 오어지(吾魚池)이다.

    이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일연 스님은 1264년에 오어사에 머문 적이 있었으므로 당시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유적에 의하면 자장(慈藏)과 혜공(惠空)·원효(元曉)·의상(義湘)의 네 조사(祖師)가 이 절과 큰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5년 오어지에서 발견된 동종이 명문을 통해 고려 말인 1216년(고종 3)에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 기간에 이 같은 우수한 동종을 조성할 정도로 사세가 컸다는 것은 짐작되지만,

    고려시대의 연혁에 관한 다른 문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에서는 1736년(영조 12) 화재로 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1741년 치철(致哲) 스님 등이 대중의 힘을 모아 중건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여러 계를 조직해 사찰의 중수 및 운영에 보탬이 되도록 한 것이 눈에 띤다.

    1811년 산내암자인 의상암에서 출발한 등촉계(燈燭契)를 비롯해서 1823년(순조 23) 염불계(念佛契)를 조직해 사찰을 중수하였으며,

    1864년(고종 1)에도 칠성계(七星契)를 만들어 사찰 중수에 힘을 모았다.

    이 같은 계의 조직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도 이어져 이 해에 나한전을 중수할 때 계가 활용되었다.

    즉, 절의 북쪽에 자장암과 혜공암, 남쪽에 원효암, 서쪽에 의상암 등의 수행처가 있었으므로 이들 네 조사의 행적과 연관짓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한전(羅漢殿)·설선당(說禪堂)·칠성각·산령각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을 제외한 당우들은 모두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 오어로1 (항사리) =















    오어사 대웅전(吾魚寺 大雄殿)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8호


    이 건물은 신라 진평왕때 처음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오어사는 원래 "항사사(恒沙寺)라 불리었다고 한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수도를 하다가 법력으로 개천의 고기를 생환토록하는 시합을 하였는데,

    두마리중 한 마리가 살아 힘차게 헤엄을 치자, 이 때 살아 움직이는 고기가 서로 자신이 살린 고기라 하여

    이 때부터 나 오(吾), 고기 어(魚)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라 불렀다고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 17년(1741)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형식의 팔작집이다.























    원효가 다녀간, 그 길위에 서다


    원효대사(617년~686년)


    원효대사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씨, 법명은 원효, 법호는 화쟁, 초명은 서당이다.
    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현재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설총의 아버지이다.
    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십년 후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도중
    하룻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이 나 토굴속에 고여 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한 원효대사는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대오한 후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이나 거지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 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그 후 파계하였다.
    파계한 후 속복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하면서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원래 본성인 일심으로 돌아가자는 임심사상,
    모두가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난다는 화쟁사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의하였고 <십문화쟁론>을 찬술하였으며,
    분황사에서 <화엄경>,<사십회향품소>를 지었다.
    원효대사는 신라 신문왕 6년 70세의 나이로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원효대사의 대표적 이야기로는 무덤 속 대오설화(해골물 설화), 철반구중설화, 화엄신장옹호설화 등이 있다.








    운제산 원효교(雲梯山 元曉橋)


    운제산(雲梯山) 자락에 위치한 오어지(吾魚池) "원효교(元曉橋)"는 일명 "출렁다리"라고 부르며,

    오어사에서 원효암 방면으로 가는 둘레길을 연결하기 위해 오어지를 가로지르는 현수교(懸垂橋)이다.
    현수교 전체길이는 118.8m이고, 폭 2m, 주탑높이 15.05m, 주탑사이 길이 82.4m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량의 동서에 위치한 주탑 4기에는 전통적인 단청형태로 시공하여

    오어사와 함께 오어지의 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도록 시공하였다.
    주탑에 채색된 잉어와 용문양은 오어사의 설화와 이어져 "오어지의 물고기가 상류로 차고 올라 용으로 승천한다"는 의미로

    원효교를 건너는 관광객들에게 입신(立身), 출세(出世)의 관문에 이르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풍수지리학자들에 의하면 용과 관련된 오어사의 지세는 북으로 회룡(回龍)하는 형국을 하고 있는 호미지맥에 해당하고

    이런 지형에 큰 명당이 만들어진다고 하며, 오어사의 터가 바로 이곳에 해당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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