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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순교성지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6. 5. 22. 04:30
황새바위순교성지
충청남도 공주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후백제를 일으키기 위해 수많은 군사들이 일어나서 웅진에서 싸우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쓰러져 피를 흘렸다.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전라도에서 발호한 수만 명이 우금치 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해 죽음을 당했다.
의로운 피를 수없이 흘린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전해진다.
공주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 처음부터 끝까지 장엄한 신앙 고백의 피를 이어받았다.조선 땅에서 천주교 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순교한
복자 권상연 야고보는 공주에서 이주해 살다가 전주 땅에서 순교했고,
'내포 지방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1784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영세 입교한 후
충청도 지방을 전교할 때 공주 지역은 그의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공주 감영이 있었다.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배교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 예산 · 해미 · 덕산 · 신창 · 홍산 · 연산 · 청양 · 보령 ·
진잠 · 유구 · 직산 · 천안 · 공주 · 비인 · 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북의 청주 · 진천 · 연풍 · 옥천, 전라도의 전주 · 광주, 경기도의 죽산 · 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 등 매우 다양하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왔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바로 이곳 '황새바위'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관장이 살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하라고 명하자 주저 없이 제 살을 물어뜯음으로써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황새바위 성지는 2012년 3월부터 1차 종합개발을 통해 성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성지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정상에 황새바위 광장과 야외성당을 조성하고,
입구 공간을 정비하며 사무실과 쉼터(카페 몽마르뜨) 등을 신축하였다.
특히 1983년 건립 당시 재원 부족으로 콘크리트에 판석을 붙여 세운 기념비적 건축물인 무덤경당도
원래 설계대로 보령 오석을 이용해 통돌쌓기 방식으로 새로 건립하여 2012년 10월 20일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14년 순교자 광장의 순교탑을 보수하며 내부에 기도실을 조성했고,2015년 황새바위 광장으로 오르는 언덕에 빛의 길과 묵주기도 길 등을 조성하고,
황새바위 광장에 두 번째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 언덕을 조성하였다.
또한 순교자 광장과 공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담하게 부활성당을 건립하고
그 앞에 순교자의 모후상을 모신 성모 광장을 조성하였다.
장기적으로는 옛 공주교도소 자리에 성지 성당을 신축하고 기존 성당을 순교기념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며,
이전 예정인 성지 맞은편 공주시 교육지원청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피정의 집과 교육관 · 사제관 · 수녀원 · 식당 등 편의시설을 갖출 계획도 갖고 있다.
박해 시대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으로 불리었던 공주는 100여 리 안팎으로 주변에 대전을 비롯한조치원 · 온양 · 예산 · 당진 · 서산 · 대천 · 유구 · 논산 · 부여 등이 인접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공주는 황새바위 순교성지뿐만 아니라 사적 제12호인 백제 시대의 대표적 고대 성곽인 공산성과 계룡산, 무령왕릉 등
백제 시대 고도(古都)의 정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어 순례와 유적지 답사를 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명소이다.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 하였다.
= 충남 공주시 왕릉로 118 (교동) =
황새바위성지 약사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 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 둔다."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흘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달레는 "공주 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다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 공산성을 마주하고 언덕 위에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공주 교동본당에서 세운 높이 13.8미터의 순교탑이 우뚝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져 있는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무덤경당 앞 순교자 광장에는 12개의 빛돌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이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묘비석이자 12사도를 상징하고 있다.
2002년 11월에는 성지 입구에 미사와 강연 등을 위한 대경당을 지어 축복식을 가졌고,
2008년 12월 22일에는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이란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등록되었다.
2009년부터는 대경당을 보수해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공주 들머리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서식했다 해서 '황새바위'로 불린다.달리는 '항쇄바위' 또는 '황쇄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바위'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는 '황쇄'에서 '쇄'가 옛말로서 '새'와 같다고 풀이해 '황쇄바위'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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