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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8. 1. 05:26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원래 성덕대왕(재위 702~737)의

    원찰(願刹, 왕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찰)이었던 봉덕사(奉德寺)에 있다가 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영묘사(靈廟寺),

    경주읍성 남문밖 동부동 옛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우리들에게는 '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종을 만들 때 어린 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는데,

    종을 칠때 나는 소리가 마치 아이가 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의 전설이 망라되어 있는 조선 후기 읍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1920년대 종을 보다 신비롭게 보이도록 지어진 이야기로 생각 됩니다.
    과연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집어넣었을까요?

    살생을 금지하여 벌레조차도 죽이지 않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린 아이를 집어넣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범중을 만들었을까요?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펼친결과 사람 뼈를 이루는 성분인 '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종입니다.

    특히 아름다운 종의 형태와 무늬, 심금을 울리는 종소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바지지 않습니다.

    종 한 가운데 손잡이 달린 향로를 받쳐 들고 있는 비천의 모습은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염원하는 듯 하지 않나요?


    =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




     

    성덕대왕신종의 명문(聖德大王神鍾銘文)

     

    성덕대왕신종의 앞뒤 면에는 이 종을 주조할 때 새긴 명문 1천여 자가 있다.

    그 중에 중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에 있어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대음은 천지의 사이에 진동하나 들어도 능히 그 울림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해의 방편인 가설을 열어 진리의 깉은 이치를 관찰하시고,

    신종을 달아 일승의 원음(진리)’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덕대왕의 덕()은 산과 바다처럼 높고 깊으며,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높이 빛났습니다.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풍속을 어루만지고, ()와 악()을 숭상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하였습니다.

    들에서 농사를 가꾸는데 힘썼으며, 시장에서는 추하고 법도에 어긋난 물건이 없었습니다.

    풍속과 민심은 금옥(金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학문과 재주를 숭상하였습니다.

    근래 효자이신 경덕대왕이 살아계실 때 왕업을 이어받아 모든 국정을 감독하고 백성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일찍이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해마다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이어 부왕인 성덕대왕이 승하하였으므로

    궐전에 임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여 추모의 정이 더욱 처량하고, 명복을 빌고자하는 생각은 다시 간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구리 12만근을 들여 종을 주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의 임금이신 혜공대왕께서는 행동은 조종(祖宗)레 명합하고, 뜻은 불교의 진극한 진리에 부합하였으며,

    탄생하신 이래로 일어났던 상서로움은 매우 특이하였고, 아름다운 덕망은 당시에 으뜸이었습니다.(중략)

    이에 아들인 혜공왕이 이 종을 만들었는데,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이함을 칭송하고 신종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경덕왕의 유언에 따라 숙원을 이루고자 유사(종 제작 담당부서)는 그 일을 주선하고,

    종의 기술자는 설계하여 본을 만들었으니 이 해가 바로 대연(重光 大淵-)년 대려(大呂=12)월 이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해와 달이 밥과 낮에 서로 빛을 빌리며, 음과 양이 서로 그 기를 조화하여 바람은 온화하고 하늘은 맑았습니다.

    마침내 신종이 완성되니 그 모양은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고, 소리는 용의 울음과 같았습니다.

     


     













    성덕대왕신종

     

    19621220일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奉德寺)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종명(鐘銘)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뒤를 이어

    771(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27t)을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화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종 위에는 웅건한 모습의 용()이 음관(音管)을 감고 있다.

    몸체에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으며,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비천상 사이의 2개처에 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범종(梵鍾)

     

    ()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그리고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습니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자를 붙여 범종이라고 부릅니다.

    이 범종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던 중생까지도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한자로 종하면, ‘쇠 금()’변에 아이 동()’자가 붙은 ‘()자를 씁니다.

    중국이나 일본 종을 일컬을 때는 이렇게 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을 지칭할 때는

     쇠 금()’ 변에 무거울 중()’자가 붙은 ‘()자를 씁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종에 새겨진 글씨나 기록에 ‘()가사 쓰였기 때문입니다.

    중국, 일본 종과 우리나라 종은 쓰는 한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종을 매다는 종뉴(鍾鈕 용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용뉴龍鈕라고도 함)는 중국식의 머리가 둘 달린 용이 아니라,

    머리와 다리를 뻗치고 있는 한 마리의 용입니다.

    이 종뉴 옆에는 중국이나 일본 종에는 없는 음통(音筒 용통甬筒, 음관音觀이라고도 함)이 있습니다.

    또한 중국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종의 위아래에는 보상화무늬나 모란당초무늬를 새긴 띠[문양대(文樣帶)]

    4개의 유곽(遊廓 연곽蓮廓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유곽 내에는 각각 9개씩,

    36개의 유두(乳頭 연꽃봉오리 형태와 같아 연뢰-라고도 부름)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과 종을 치는 부분에 당좌(撞座)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에 새겨진 글은 무슨 내용일까?

     

    성덕대왕신종에는 두 군데에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면(현재 동면)에는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기록인 산문이 있고,

    그 반대면(현재 서면)에는 네 글자씩 50줄로 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 사람, 종을 만든 사람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산문은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종의 이름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56)이 선대왕인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 12만 근으로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昇遐)하자,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즉위 7위만인 대력(大曆 중국 당나라 대종大宗의 연호) 6(771) 신해년(辛亥年) 1214일에 종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운문은 우선 삼국을 아우른 신라를 예찬(禮讚)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나라 구석까지 성스러운 교화(敎化)를 펴 모든 것이 새롭게 뻗어나가게 하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질서를 기반으로 만대의 번영을 누리자는 각오와 다짐을 적고 있습니다.

     


     


    주종 대박사 박대나마 기념비(鑄鐘 大博士 朴大奈麻 記念碑)


    신라 성덕대왕 신종(成德大王 神鐘)은 혜공왕(惠恭王) 7(771)에 이룩된 통일신라 문화의 기념비적 보배이다.

    종명(鐘名)의 몇 구절이 이 종의 주성(鑄成) 내력과 그 신묘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종은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대왕을 위하여 구리 12만 근으로 1()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에 그 아들 혜공왕이 어머니 김씨 만월부인 의 도움으로 완공하였다.

    사람과 신의 힘을 합하여 만들었으니, 그 형체는 산악과 같이 위엄이 있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꽃다운 사람은 꽃다운 인연을 맺어 복을 받는다 하였다.
    실로 이종은 조형의 아름다움이나 소리의 장중함에 있어 인류가 만든 범종(梵鐘) 중에 가장 으뜸이라 하겠다.

    이 신묘한 종을 만든 신공(神工)의 이름이 종명에 새겨져 있었지만,

    천 수백 년 오랜 세월이 흐름에 그 이름을 확연히 읽을 수가 없음이 애석하다.
    다만 그 우두머리인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의 성씨는 박()이요, 벼슬은 대나마(大奈麻)였다.

    우리는 오늘 이 위대한 선현의 높은 예술적 경지와 뛰어난 과학기술을 기리기 위하여

    성덕대왕 신종을 만든 박대나마의 위대한 공적을 이 돌에 새겨 후일에 전하고자 한다.
    1987년 경주시에서 세우고, 글을 문화재위원 문학박사 황수영(黃壽永)이 짓고, 글씨는 정수암(鄭壽岩)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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