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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두산 순교성지(切頭山 殉敎聖地)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6. 12. 5. 05:10

    절두산 순교성지(切頭山 殉敎聖地)




    강변의 성모






    가톨릭 순교 성지


    이곳은 1866~67년에 걸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교회와 천주께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박해를 당하고 치명한 거룩한 땅입니다.












    형구돌(形具石)


    병인박해때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잔혹한 형구





    노기남 대주교의 금경축(金慶祝) 기념비


    한국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자 제 10대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1902~1984) 대주교의

    사제 수품 50주년 기념비(1980. 10.26)
    연자매로 만들었으며 노기남 대주교가 교구장직을 은퇴한 후 머물던 합정동 자택에 세워져 있다가 성지로 옮겼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첫 순교자 가족으로 기록된 이의송(프란치스코)의 가족
    두 어른과 한 아이의 몸통 위에 목이 겨우 얹혀있다.
    다정한 가족의 모습 같아 보이지만 아이 손은 밧줄로 묶여있다.







    성 김대건 신부 동상


    성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라났다.
    1836년 16세 때에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

    844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금가항(金家巷) 교우촌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귀국한 후 국내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들의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6월 5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연락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해주 감영과 서울에서 4차례의 문초와 40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배교시켜 인재로 등용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하고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자 끝내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에 군문효수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였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신을 만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했다.

     
    나이 : 25세 / 순교연월일 : 1846년 9월 16일 / 순교장소 : 새남터 / 형벌 : 군문효수







    척화비(斥和碑)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碑石).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 남종삼 세례자 요한


    성 요한 남종삼(聖 南鐘三)은 충주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인 18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철종 때에는 승지가 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으나 나라의 공식적인 의식이 있을 때는 교리에 맞지 않는

    조상 숭배 행위에 참여해야 하였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한 때, 가문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떠나 가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열중하며 외국 신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1863년에 생활의 궁핍으로 다시 승지의 관직에 일하게 되었는데,

     1864년 이후 국경을 넘나드는 러시아 배 문제로 대원군 부인 민씨는 조선에 와 있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이 일을 의뢰하기 위해 남 요한을 부르기도 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대신들이 박해를 탄원하자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졌고, 남 요한 역시 체포되었다.

    의금부에 마련된 국청에서 6차에 걸쳐 베르뇌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 및 다른 교우들과 함께 엄중 문초를 당하였다.

    1866년 3월 7일,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같이 참수형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순교 성인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나이 : 49세 / 순교연월일 : 1866년 3월 7일 / 순교장소: 서소문밖 / 형벌 : 참수








    영광의 돌기둥


    1973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이순석(李順石, 바오로)교수가 제작했으며,

    강화도 근처 바닷속에서 수집한 자연석에 직접 글을 새겼다.

    높이 2.25m, 둘레 1, 8m의 검은 돌기둥 앞면에는 영광이란 글자를,

    뒷면에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주는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기도문을 십자가 모양으로 새겨 넣었다.

    상단에 새겨진 가시관과 왕관은 고통과 죽음을 이룬 순교자들의 영광을 상징한다.

     






    오성바위


    1866년에 순교한 다섯명의 성인이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러갈 때 쉬었다 간 바위라는 오성바위

























    절두산 순교성지(切頭山 殉敎聖地)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순교 사적지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에 조선을 침범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주로 처형하였다.
    그 이유는 프랑스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던 한강의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범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림과 동시에 그 본보기를 보이려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수 많은 유명·무명 신자들이 처형된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목이 베어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 '절두산(切頭山)' 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상 확인된 신자수는 29명(무명 5명 포함) 뿐이다.

    1956년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전개된 순교터 확보 운동의 결과

    같은 해 12월에 이곳의 부지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962년에는 순교 기념탑을 키웠고, 1967년에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의 신앙을 배우고 느끼며 고양하기 위해 이곳에 기념 성당 지하실에 순교자 유해 안치실을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순교성인 27위와 무명 순교자 1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84년 5월 3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과 103위 순교자의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찾아 한국 순교자들에게 뜨거운 경의를 표하였다.

    한편 1997년 11월 7일에는 성지가 위치해 있는 양화진. 잠두봉이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8월에는 성지내 박물관의 명칭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변경하였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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