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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 봉선사(雲嶽山 奉先寺)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6. 12. 16. 05:30
운악산 봉선사(雲嶽山 奉先寺)
운허당대종사승탑(耘虛堂大宗師僧塔) - 부도
운허용하(耘虛龍夏) 스님은 한국불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경전 번역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이 일은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1946년 지금의 청풍루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운허 스님의 부도는 석종형 부도로 사각의 고임돌에 연꽃 모양의 위, 아래 받침돌을 올리고, 종모양의 몸돌을 올렸다.僧科園(승과원) - 승과평 터
명종6년(1551) 봉선사(奉先寺)가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특선(特選) 되었다.
교종갑찰이란 전국 승려들의 교학(敎學) 능력을 평정(評定)하는 곳으로 일종의 승려들의 과거장(科擧場)이다.
명종7년(1552) 승과(僧科)가 열리니 서산, 사명 같은 고승께서도 응시하였다고 한다.
그간 구전(口傳)되어 오던 과거장, 僧科坪(승과평)자리를 주변 원지(園地)와 더불어승과원이라 이름 짓고 불기2553년(서기 2009년) 7월에 이 표석을 세운다.
봉선사가 교종 수사찰(首寺刹)이 되는 것은 명종(明宗)이 등극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불교 부흥 정책을 전개하면서 비롯됐다.
명종6년(1551) 6월25일에 문정왕후는 普雨(보우)를 判禪宗事都大禪師 奉恩寺 주지로,수진(守眞)을 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로 임명하고 각각 선종과 교종을 총괄토록했다.
봉은사를 선종의 수사찰,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정하고 승과를 부활하여
선교 양종의 인재를 시험보아 뽑으라고 명령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 모두 승과를 보이게 하니 명종7년(1552) 壬子 式年試부터는
봉은사에서 선종시를, 봉선사에서 교종시를 보여 인재를 가려 뽑기 시작했다.청풍루
청풍루는 신도들의 '조약돌모으기 운동으로 1985년에 건립된 커다란 누각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120평에 달하며 앞에는 김응현(金膺顯)이 쓴 ‘청풍루(淸風樓)’,뒤에는 배길기(裵吉基)가 쓴 ‘설법전(說法殿)’ 현판이 걸려 있고 상층은 누마루형 마루방으로 대형법회에 쓰인다.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화를 모셨고 , 방학을 이용해 절을 찾는 청소년들의 수련대회 장소로 사용한다.방적당
방적당은 발걸음을 좀 자유롭게 놓아 둔다는 뜻으로 더 나은 수행을 준비하는 곳이다
방적당은 스님들이 첫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다듬는 곳이다
방적당 안에는 작은 아미타불상과 용문사에서 옮겨온 가로 224㎝, 세로 168㎝의 아미타 후불탱화를 모셨다.큰법당
큰 법당은 한국전쟁 당시 전소돼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새롭게 복원됬다.
전통건축물을 모방한 콘크리트건물의 초기 작품으로서, 남아있는 전통목조양식을 모조한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가장 완성도가 높고 전통목조건축물을 재현한 초창기 콘크리트건물로서는 조형감이 뛰어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편액을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법당'이란 한 것은 순 우리말 이름의 현판과
주련을 붙인 운허스님의 불교대중화 정신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대개의 사찰이 석가여래를 모시고 대웅전이라 하는데 큰법당을 대웅전이라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표기한 절은 봉선사가 유일하고 큰법당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법화경과 한문법화경을 양각한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
큰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5층탑이 있다.조사전
조사전은 1977년 삼성각과 꼭 같은 규모로 지어서 계민선사와 월초스님을 비롯한
근대의 봉선사 조사스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당우로서 맞배지붕에 간결하면서 옹골지다.
삼성각
삼성각은 1926년 주지 월초(月初) 화상이 처음 지은 것인데
일찍이 원흥사에서 옮겨와 6·25때 폭격으로 다른건물은 모두 사라졌지만 ,
이 삼성각만은 불발탄의 덕택으로 화를 면했다고 하며 현판은 산령각·북두각·독성각이라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깃발을 세우는 기둥으로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기(幢, 당)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다.
봉선사 당간지주는 서기 1469년 당사 초창 때 세워진 것으로 명종 6년 승과고시 부활과 더불어전국 승려들이 모여 승과평(僧科坪)에서 시험을 치룰 때 승과기(僧科旗)를 높이 달아 두었다고 한다.
1매의 대석을 깍아내어 양쪽 기둥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보기 드문 형태이다.
기둥 높이 148cm, 기둥 너비 34cm, 기둥 사이 40cm, 전체 너비 108cm, 두께 100cm로 웅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마비(下馬碑)
하마비(下馬碑)는 사원이나 종묘, 궐문 또는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는 석비로노소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존경을 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봉선사 하마비는 서기 1469년 조선 7대 세조대왕의 위패를 어실각(御室閣)에 모시고 중창불사를 하면서 세워진 것으로이곳을 지나는 정승, 판서도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높이 93cm, 너비 37cm, 두께 18cm 크기의 대리석으로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음각되어 있다.봉선사(奉先寺)
봉선사(奉先寺)는 고려(高麗) 광종(光宗) 20년(969)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운악산(雲岳山)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雲岳寺)라 칭하였다고 한다.
운악사는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7개의 종파(宗派)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양종(兩宗)으로 통합됨에 따라 혁파되었다가예종(睿宗) 1년 (1469)에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가 선왕(先王)인 세조(世祖)의 능침(陵寢)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重創)하고 봉선서(奉先寺)라 하였다.
봉선사는 명종(明宗) 6년 (1551)에 교종(敎宗)을 대표하는 사찰로서전국의 승려및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高宗) 광무(光武) 6년(1902)에는 경기도내 전사찰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962년 전국의 사찰 중 제25교구 본사(本寺)로서의 역할 을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절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수차례 중수(重修)하였으나한국전쟁 때 법당 등 14동 150 칸의 사우(寺宇)가 또다시 완전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모두 근대에 건립된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초기 범종(梵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봉선사대종(奉先寺大鐘,1469 , 보물 제397호)이 있으며짜임새있는 구성과 사실적 묘사수법을 보여주는 봉선사괘불(奉先寺掛佛, 1735)이 있다.
운악산 봉선사(雲嶽山 奉先寺)
봉선사(奉先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로서, 조계종 25교구 본사입니다.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산 자락에 절을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부른 것이 봉선사의 전신이라고 전해집니다.
봉선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예종 때인 1469년으로 왕의 어머니인 정희대비가 죽은 남편 세조의 능을 운악산으로 이장하여광릉이라고 하고 이 절을 세조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아 "선왕을 받든다"는 뜻으로 봉선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교종의 으뜸 사찰로 지정되는 등 사세가 번창하던 봉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1637년에 복구했으나,한국전쟁으로 또 다시 전소되어 이후 1956년에 화엄스님이 범종각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운허스님, 운경스님, 능허스님, 월운스님 등이 복구를 하여 지금의 봉선사로 일신하였습니다.
큰법당은 전통건축물을 모방한 콘크리트건물의 초기 작품으로서,남아있는 전통목조양식을 모조한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아 등록문화재 제5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편액을 대웅전이라고 하지 않고 "큰법당"이라고 한 것은 순 우리말 이름의 현판과 주련을 붙인
운허스님의 불교 대중화정신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5층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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