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秋史 金正喜 先生 古宅)과 유적지(遺蹟地)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5. 9. 07:13

    추사 김정희선생 고택(秋史 金正喜先生 古宅)과 유적지(遺蹟地)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 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 고택의 모습을 갖추웠다.

    월성위궁은 서울의 저택으로 김정희가 관직 활동을 할 때 주로 지내던 곳이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김정희선생 고택은 197618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 사랑채(秋史古宅 舍廊)

     

    사랑채는 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대청 쪽으로 난 문은 모두 들어열개 문으로서 위로 활짝 열 수 있어 개방적이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성이 잘 살아 있는 구조이다.

    고택에 있던 김정희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다고 하는데, 1910년 무렵 화재로 불타버렸다.

     

     

     

     

     

    해시계(時計)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 이 네모난 돌기둥은 해시계로 쓰였다.

    건물 전체가 동서 방향으로 자리 잡은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金商佑)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매실

     

     

     

     

    추사고택(秋史古宅) 안채

     

    안채는 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6칸 대청은 흔치 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 주택 구조로서.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백송(白松)

     

     

     

     

     

    추사고택 영당(秋史古宅 影堂 )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金商懋)가 세운 영당이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權敦仁)은 영당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秋史影室) 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李漢喆)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畫像贊)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우물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다.

    우물에는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묘()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

     

    김정희와 첫째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안 이씨 세 분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비문은 1937년에 후손인 김승렬(金承烈)이 짓고 새겼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쳤다.

    죽기 전까지 글씨 쓰기를 계속했는데, 봉은사 경판전을 위한 현판인

    판전((板殿,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을 쓴 것이 죽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였고 제자들이 다투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문을 바쳤다.

     

     

     

     

     

    작품명 : 추사와 인보

     

    작가명 : 권창륜, 설치연도 : 2008

    추사 선생님의 인보200과 중 대표작.

    12과를 음.양각 전각하여 시각적으로 아름다움을 감상케 하고

    전면에는 사야(史野) 문자를 돌출시켜 인보와 문자의 조화를 주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

    과파(果坡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

     

     

     

    작품명 : 고독한 예술혼

    遊天戱海(유천희해)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

     

    작가명 : 강관욱 설치연도 : 2008

    고고한 예술혼을 지니신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제주 유배시절을 상상하며

    옥돌괴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고독을 조각작품으로 표현하였다.

     

     

     

     

    추사기념관

     

     

     

    秋史先生學藝術碑(추사선생학예술비)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고

    書勢如孤松一枝(서세여고송일지)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추사고택의 사계(봄)

     

     

     

    추사고택의 사계(여름)

     

     

     

    추사고택의 사계(가을)

     

     

     

    추사고택의 사계(겨울)

     

     

     

    추사고택(秋史古宅)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선생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주변에는 추사선생 묘, 월성위·화순옹주 묘와 정려문, 백송, 추사선생이 수도하던 화암사 등

    추사선생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있다.

     

    추사고택은 304.47(92)으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안채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자형의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6칸으로 그리 흔치 않은 규모이다.

    이러한 ''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형이다.

     

    사랑채는 바깥 솟을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은 ''자형 집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 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이와 같이 마루공간이 큰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추사(秋史)의 학문과 예술

     

    추사 김정희선생은 17866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벼슬은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지내다

    말년에 생부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1010(철종7)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계를 탈피하여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 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先覺者)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 청조의 고증학풍(考證學風)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문자학(文字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까지 박통(博通)하였고,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綠),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재시집(覃揅齋詩集)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 (), (), 전각(篆刻)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書道)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자일문(獨者一門)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 등이 있다.

     

     

     

    김정희 선생 고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김정희 선생 유적 (충청남도 기념물 제24호)

     

     

     

     

    김정희 선생 유적 - 충청남도 기념물 제24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글과 그림, 글씨가 독창적이며,

    이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이며 예술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일찍 글을 깨우치며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24세인 순조 9(1809)에 청나라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간 김정희는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고 이후 일생 교유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에는 '사실을 밝혀서 진리를 추구한다.'라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을 완성해 나갔다.

    김정희는 제자가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들 중에 19세기 후반 개화사상가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많다.

    55세 때인 헌종 6(1840)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 약 9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인기가 높아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헌종은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하여 유배 중에도 글씨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는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고택과 그가 묻힌 무덤,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의 묘와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열녀문,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 그가 수도하던 화암사 등의 유적이 있어 그의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