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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 중화문(德壽宮 中和門) 및 중화전(中和殿) - 보물 제819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5. 20. 04:58

    덕수궁 중화문(德壽宮 中和門) 및 중화전(中和殿) - 보물 제819

     

     

     

     

     

     

    덕수궁 중화전 품계석(德壽宮 中和殿 品階石)

     

    품계석(品階石)은 좌우에 각각 12개씩 모두 24개가 놓여져 있으며 조선의 품계는 모두 18계로 나누어져 있다.

    품계석은 좌우로 12개씩 나뉘는데, ()에는 문신(동반)이 우()에는 무신(서반)이 서게 된다.

    그리고 1품과 3품은 정종(正從)으로 나누어서 1품에서 3품까지의 품계석은  좌우 각각 6개씩 모두 12개가 된다.

    4품에서 9품까지는 정종 구분없이 품계석을 세워 좌우 각각 6개씩 모두 12개가 된다.

    이렇게 해서 품계석은 모두 24개가 된다.

    품계석을 36개가 아닌 24개로 한정한 것은 조선이 농경사회에 근간을 둔 국가이기 때문이며.

    24라는 숫자는 곧 24절기를 뜻하고, 24절기는 농경사회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기이고

    하나의 커다란 1년 계획표와 같은 것이다.

     

     

     

    중화전 월대를 오르는 답도와 계단

     

    월대를 오른는 계단 중앙에는 국왕의 가마가 지나는 길인 답도에 소맷돌과 석수가 설치되어 있다.

    하월대는 5계단, 상월대는 3계단으로 되어 있다. 국왕의 권위를 느끼기에는 경복궁에 비해서 부족해 보인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과 고종의 위상을 보는 듯 하다.

    황제국을 표방했음에도 월대는 중국 자금성 태화전과 달리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월대 소맷돌에는 봉황이 새겨진 다른 궁궐과 달리 두마리의 용이 새겨,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줄려고 하고 있다.

    반면에 상월대에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다.

     

     

     

     

     

    덕수궁 중화전 옥좌

     

    궁궐에서 가장 근엄하고 상징적인 공간은 정전 내부이다.
    덕수궁 중화전 옥좌는 고종 임금이 실제 앉았던 것으로

    용상(龍床)이나 삼절곡병(三折曲屛, 세 번 굽은 병풍), 일월오봉병 등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특히, 정전 안 어좌(御座) 바로 위의 닫집을 보면 용 한 쌍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전 천정의 용과 같은 문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궁이었음을 보여준다.

     

     

     

     

     

     

     

    덕수궁 중화전 드므

     

    드므'넓적하게 생긴 독'이라는 순수 우리말이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그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드므에는 囍聖壽萬歲(희성수만세)라는 글씨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고종 때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청동향로

     

    향로는 정전에서 각종 의식이 거행될 때 좌우에서 향을 피웠다.

     

     

     

     

     

     

    덕수궁 중화문(德壽宮 中和門) 및 중화전(中和殿) - 보물 제819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북으로 피난하던 선조가 환도하여

    이곳에서 정무를 봄에 따라 행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1611(광해군 3)에 경운궁(慶運宮)이란 정식 명칭이 붙여졌다.

    경운궁의 정전으로 초기에는 즉조당(卽祚堂)이 사용되었는데 1897년에 이 전각의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이라 고쳤다.

    대한제국의 선포로 왕은 황제가 되어 여기에서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 다시 전각 이름을 태극전에서 중화전으로 바꾸었다.

    그 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인 1902(광무 6)에 즉조당 앞에 새로운 중층의 법전(法殿)을 지어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인정전에 비견될 만큼의 격식을 갖추었으나,

    1904(광무 8) 경운궁의 대화재 때 소실되어 다시 중건된 것이 현재 남아있는 단층의 중화전이다.

    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61.4), 측면 4(58)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초석을 놓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에는 석계가 마련되어 있고, 석계 한가운데에 답도를 놓아 쌍용을 새겨놓았으며,

    각 층마다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공포는 내4출목, 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으며,

    중화전에서 사용된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것은 초각형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특히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고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의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으로 장식하여 건물의 위상을 높였다.

    중화문은 정면 3,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는데 건축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문의 양 측면에는 남회랑(南回廊: 행각(行閣))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동쪽 모서리 부분만 일부 남아있을 뿐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중화문은 단층의 삼문으로 세벌대의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 잡상 등을 얹었다.

    석대 앞의 석계는 3등분되었는데 중앙부 좌우에만 석수(石獸)를 두고, 답도(踏道)에는 쌍용문(雙龍紋)이 새겨져 있다.

    평면 크기에 비해 기둥 높이가 높아 다른 문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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