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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행궁(華城行宮)의 정전, 봉수당(奉壽堂)
    수원사랑/화성행궁(華城行宮) 2017. 3. 4. 23:00

    화성행궁(華城行宮)의 정전,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의 동헌(東軒)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정조 19) 정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혜빈(惠嬪)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존호를 올리고,

    혜경궁(惠慶宮)의 회갑연을 미리 앞당겨 윤213일 원행(園幸) 시에 회갑 진찬례(進饌禮)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악장(樂章)과 자신의 마음을 읊은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만년(萬年)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에 쓰게 하였다.

    상량문은 정수재 이병모(靜修齋 李秉摸:17421806)가 지었는데,

    어머님의 연세 회갑에 올랐으니 오래살기를 바라는 임금님 생각 더욱 간절하네.”라고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정조 13) 819일 상량하고 925일 완공되었다.
    17902월 원행시에 정조는 장남헌이라고 직접 써서 편액을 달았으며, 그 후 1794(정조 18)에 증축하였다.

    봉수당의 사방으로 여러 출입문이 나있는데, 정면인 동쪽으로 중양문(中陽門)이 있고, 남쪽에 경선문(慶善門),

    북쪽에 어천문(於千門)과 유억문(維億門건장문(建章門), 서쪽에 중영문(重英門)이 세워져 있었다.

    봉수당 서쪽 처마는 장락당 처마와 서로 겹쳐져 있고, 남쪽 퇴는 바로 경룡관(景龍館) 북행각으로 통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실린봉수당 진찬도(奉壽堂 進饌圖)에는

    건물에 거북 무늬의 발이 쳐져 있고 건물 앞으로 여러 악공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각종 춤이 공연되고 있으며

    주변에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둘러앉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는 진찬례를 마치고 교()를 내려 몇 년 전부터 축수(祝壽)를 기도해 왔는데 오늘에서야 진찬례를 올리게 되었다.

    천기(天氣)가 청화(淸和)하고, 어머님의 건강이 강녕하시니 기쁘고 경사스럽기 그지없소.”라고 하며

    9년 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당시의 커다란 화젯거리로 행사에는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날의 성대한 잔치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이희평의 화성일기등 많은 자료에 의해 그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1997년 봉수당 건물을 복원하였으나, 봉수당 현판은 없어졌고, 원래의 장남헌 현판은 문화재청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경선문(慶善門)


    유여택(維與宅)의 북쪽 문인 연희문(延暉門)을 통해 서쪽으로 나가면 북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봉수당(奉壽堂)의 앞 마당이 된다.
    담장에 붙어 두개의 기둥을 가지고 있는 구조인데 일각문이라 한다
    이보다 큰 문은 사주문(4개의 기둥)이 있다.
    경선문의 뜻은 당나라 태종이 태어난 고택의 이름이 경선궁으로 당태종이 경선궁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고

    시를 지어 악기로 연주 하도록 하고 이를 공성경선악(功成慶善樂)’이라 명명하였으며,

    동자(童子)를 시켜 구공무(九功舞)를 추게 하였다.

    資治通鑑 卷194 唐紀 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上之下에서 온 말이며

    당시 창경궁의 세자궁인 건극당(建極堂)의 여러개 정문 중 경선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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