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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 삼각산 청룡사(三角山 靑龍寺)와 정업원유지(淨業院遺址)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7. 6. 14. 05:27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

    삼각산 청룡사(三角山 靑龍寺)와 정업원유지(淨業院遺址)

     

    청룡사는 고려 태조5(922)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왕건이 명을 내려 창건한 절이다.

    풍수 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에 해당되는 산등에 지었다고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

    그 후 원 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 되었으나 조선 태종 5(1405) 무학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한 이후 중종대와 인조대에 다시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1세 주지로 혜원(慧圓)이 절을 맡은 이래로, 줄곧 비구니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예로 조선 건국 이후 이제현(李齊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있었다거나,

    1차 왕자의 난 뒤에는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세조 때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곳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았다고도 한다.

    영조 47(1771) 나라에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리고 비석과 비각을 세우면서

    사찰 이름을 잠시 정업원으로 개명 하였으나 그 기간은 약 50여년 이었다고 한다.

    순조 23(1823) 왕명에 의해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 65(숭인동)

     

     

     

     

     

     

     

    심검당(尋劒堂)

     

    심검당은 대웅전 앞 왼편, 명부전 아래에 있다. 심검당이란 참선을 하는 도량이라는 의미이다.

     

     

     

     

     

    우화루(雨花樓)

     

    유배길에 오른 단종은 잠시 청룡사에 들러 이곳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작별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한 이별을 나눈 곳이라서 영리정(永離亭)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대웅전(大雄殿)

     

    현재의 대웅전은 1973년 극락전 자리에 터를 넓혀서 정면 5,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것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두 분의 협시보살님을 모셨으며, 부처님을 바라보고 오른편에 신중을, 왼편에 영가를 모셨다.

    안에는 1868년에 제작된 지장탱화와, 현왕탱화, 칠성탱화와 1898년에 조성된 감로화가 있으며 신중탱화, 후불탱화가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상은 1973년에 새로 모셨으나 종전 극락전에서 모셔왔던 탱화 등이 조성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본다.

    대웅전 현판은 청남 오제봉(吳濟峰)의 글씨다.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동쪽에 명부전이 있다. 전면 3간 측면 1간의 맞배지붕이다.

    명부전에는 지장삼존상과, 지장탱화, 시왕탱화, 사자탱화 등의 불화와 시왕과 그 권속들이 있다.

    시왕과 권속 22위는 1957년 대구 보현사에서 이안해온 것인데

    이 때 복장다라니를 모시던 중 제일진광대왕(第一秦廣大王)의 복장에서 조성 연기문이 나왔다.

    연기문에는 16604월에 조성되어 동학산 용밀사에 봉안하였다는 내용과

    증명으로는 단허, 상화원(上畵員) 승일과 승조, 화원(畵員) 명신 등의 이름이 있다.

     

     

     

     

     

     

     

    산령각(山靈閣)

     

    산령각은 대웅전 뒤편에 있다. 전면 측면 각 1간으로 맞배지붕이다.

    안에는 1891년에 조성한 독성탱화와 1902년에 제작된 산신탱화가 모셔졌다.

    1958년까지는 칠성각과 독성각이 각각 모셔졌으나 최근 이를 모두 헐고

    독성탱화는 산령각으로, 칠선탱화는 대웅전으로 옮겼다.

     

     

     

     

     

     

     

     

     

    前峯後巖於千萬年(전봉후암어천만년)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정업원유지(淨業院遺址)

     

    이곳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가 궁에서 물러난 뒤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자 이곳에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안녕을 빌었다.

    단종이 죽은 후 1521(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

    훗날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영조 47)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원래 정업원이란 양반 출신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절을 말한다.

    정업원과 마주하는 봉우리에는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정순왕후가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좀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업원 터 비석에는 정업원 옛터 신묘년 9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淨業院舊基 歲辛卯九月六日欽涕書, 정업원구기 세신묘구월육일흠체서)'라는 글씨와

    비각 현판에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前峯後巖於千萬年, 전봉후암어천만년)‘라는 글이 있다.

    이것은 모두 정조의 친필이다. 이 비석은 정면 1,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비각 안에 있다.

     

     

     

    자주바위 어린이공원

     

    정순왕후는 청룡사로 온 후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수행하는 한편

    절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하여 댕기, 저고리, 옷고름, 끝동, 옷감에 자주물을 들여 내다 팔았다.

    자주물을 들인 천을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그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자주동이라 불렀다.

     

     

     

     

    동망봉(東望峰)

     

    동망봉은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던 곳이다.

    영조 47(1771)에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자를 써서 이곳에 있는 바위에 새기게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샘)

     

    조선조 제6대왕인 단종의 비 송씨(定順王后)는 영월로 귀양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세 시녀와 숭인동 17번지(청룡사 옆) 정업원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업원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 샘물이 흘러 나오길래

    이 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물이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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