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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집옥재(景福宮 集玉齋)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6. 25. 05:30

    경복궁 집옥재(景福宮 集玉齋)

     

    건청궁의 서쪽 어구 건너편에 있는 집옥재는 원래 창덕궁에 지었던 건물이다.

    고종 13년 겨울, 화재로 내전이 대부분 소실되자 임금은 창덕궁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재위 18(1881), 고종은 경복궁의 복구가 지지부진하자 침전으로 함녕전(위치와 규모는 자세하지 않다)을 지으면서

    부속 건물로 서쪽에 협길당, 북쪽에 집옥재를 지었다.

    그리고 창덕궁으로 옮긴지 9년째 되던 해 정월에 경복궁이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환어(還御)했다.

    소실된 내전 공사는 고종 25년 초여름부터 활기를 띠었다.

    내전을 복구한 뒤에는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와 협길당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다.

    고종은 이곳에 역대 어진을 봉안하고 서재 겸 외교사절 접견장으로 활용했다.

    건청궁이 내전과 같은 곳이라면 집옥재는 책을 읽고 외부인을 만나는 편전에 해당하는 셈이다.

    고종 30(1893) 한 해만도 영국, 일본, 러시아 공사 등 외교사절을 5회나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심건물인 집옥재는 서쪽에 팔우정(八隅亭), 동쪽에 협길당(協吉堂)을 끼고 있다.

    세 채의 건물이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교태전이나 자경전처럼 건물 사이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경복궁 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장 유별난 점은 청나라 양식의 집옥재 외관과 복도각의 유리창이다.

    이 같은 양식(樣式)과 자재는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다

    집옥재는 댓돌을 쌓아 면석을 깔고 앞면 5, 옆면 3칸으로 올린 건물이다.

    지댓돌 전면에는 아홉 겹의 계단을 놓고 네 마리의 석수를 새긴 소맷돌을 놓아 삼계(三階)로 짜고, 어계에는 답도를 두었다.

    답도에는 경운궁처럼 용을 새겼다. 규모가 저전 답도보다 작아 앙증맞다.

    월대처럼 보이는 장방형의 지댓돌은 다른 전각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규모다.

    초석도 방형주추에 다시 가운데가 불룩한 북 모양의 고복주추를 얹고 그 위에 주련을 건 원주를 세웠다.

    앞 퇴는 5칸 모두 개방했으며, 화려한 비단단청을 입혔다.

    건물 바깥에 입힌 비단단청은 경복궁에서 집옥재 일원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전각은 거개가 모루단청이다. 창호의 모양인 살대는 중국풍이고,

    편액도 송나라 때 명필이었던 미불[미불, 자는 원장(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의 전각처럼 세로로 걸었다.

    건물의 옆면은 벽돌로 막고 박공 아래는 8각 구멍 두 개를 나란히 뚫어 광창을 냈다.

    창덕궁 연경당 선향재의 옆면과 비슷하다.

    뒷면 벽돌벽 가운데 칸은 만월창을 달아 석재로 테를 둘렀으며

    나머지 네 칸에는 다시 아치형의 반월창을 양쪽으로 두 개씩 텄다.

    겹처마 맞배지붕의 용마루 끝에는 중국식 건물에 나타나는 용모양의 이물(異物)로 마감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용마루와 처마는 평행이다.

     

     

     

     

     

     

     

     

     

     

     

     

     

     

     

     

     

     

     

     

     

     

     

     

    고종황제(高宗皇帝)와 집옥재(集玉齋)

     

    집옥재의 역사는 1881(고종 18) 창덕궁에서 시작된다.

    당시 고종의 명으로 창덕궁의 수정전을 함녕전으로 이름을 바꾼 뒤, 그 뒤편에 별당으로 지은 것이 집옥재이다.

    1885(고종 22)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건청궁에 집무공간과 거처를 두었고,

    서구 열강에 맞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1891(고종 28) 7월 창덕궁의 집옥재를 경복궁의 향원정 북쪽, 건청궁의 서편이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

    책을 통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과 개화정책의 구상을 위해 집옥재라는 왕실도서관을 건립하였다.

    집옥(集玉)’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는 뜻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 4만 권이 넘는 귀중한 서책들을 모았다.

    도서는 대부분 서구의 근대 문물에 관한 것이었다.

    집옥재는 을미사변 이전까지 개화정책 추진의 중심장소로 기능했다.

    집옥재의 도서는 1908년경 고종이 대한제국 왕실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제실도서(帝室圖書)로 지정하였으나, 1915년 총독부 도서로 전환되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과 이왕직(李王職)으로 분산된 뒤

    현재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전하고 있다.

    집옥재 권역은 1990년대 말까지 경복궁 안에 대통령 경호대가 주둔하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다.

    1996년 말 경복궁정비계획에 따라 주둔 부대가 철수하고 경복궁이 관리영역으로 들어왔고,

    현재는 작은도서관으로 조성되어 시민의 독서 및 역사체험공간으로 개방되었다.

     

     

     

     

    집옥재 주련(集玉齋 柱聯)

     

    灑潤含膏 雲氣多壽 (쇄윤함고 운기다수)

    촉촉이 젖어 기름지니 운기(雲氣)는 장수하게 해 주고,

     

    稱物納照 鏡心彌光 (칭물납조 경심미광)

    만나는 사물마다 비추어 주니 거울은 더욱 밝도다.

     

    玉樹陵霄 雲煙煥采 (옥수능소 운연환채)

    아름다운 나무가 하늘에 솟으니 안개구름 찬란히 빛나고,

     

    寶花留硏 筆墨生香 (보화류연 필묵생향)

    귀한 꽃이 벼룻가에 머무니 필묵(筆墨)에 향기가 나도다!

     

    西山朝來 致有爽氣 (서산조래 치유상기)

    서산에 아침이 되니 상쾌한 기운이 이르고,

     

    太華夜碧 人聞淸鐘 (태화야벽 인문청종)

    태화산(太華山)에 밤 깊으니 맑은 종소리를 듣도다!

     

     

     

    灑潤含膏 雲氣多壽 (쇄윤함고 운기다수)

    촉촉이 젖어 기름지니 운기(雲氣)는 장수하게 해 주고,

     

     

     

    稱物納照 鏡心彌光 (칭물납조 경심미광)

    만나는 사물마다 비추어 주니 거울은 더욱 밝도다.

     

     

     

    玉樹陵霄 雲煙煥采 (옥수능소 운연환채)

    아름다운 나무가 하늘에 솟으니 안개구름 찬란히 빛나고,

     

     

     

    寶花留硏 筆墨生香 (보화류연 필묵생향)

    귀한 꽃이 벼룻가에 머무니 필묵(筆墨)에 향기가 나도다!

     

     

     

    西山朝來 致有爽氣 (서산조래 치유상기)

    서산에 아침이 되니 상쾌한 기운이 이르고,

     

     

     

    太華夜碧 人聞淸鐘 (태화야벽 인문청종)

    태화산(太華山)에 밤 깊으니 맑은 종소리를 듣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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