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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신무문(景福宮 神武門)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6. 23. 05:27

    경복궁 신무문(景福宮 神武門)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으며,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었다.

    원래 경복궁 건립 당시 북쪽 담은 목책으로 이루어지고 북쪽 문은 없었으며, 신무문은 1433(세종 15)에 건립된 것이다.

    신무문이 건립되면서 경복궁의 4대 문이 모두 갖추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무문(神武門)이라는 이름은

    1475(성종 6) 823일 서거정이 후보로 올려 성종이 낙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무"라는 이름은 네 방향을 관장하는 동물신 중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에서 따 온 것이며,

    "신묘하게 뛰어난 무용"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될 때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된 것은 1865(고종 2)이며, 중건 당시 현판은 이현직이 썼다.

    신무문의 성벽에는 온 세상이 태평성대를 누리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천하가 태평한 봄날과 같다.)"이라는 글귀를 새겨놓았다.

    신무문은 음기가 강하다는 이유로 평소에는 닫아두었다가, 비상시 또는 왕의 비밀 행차 때나 사용하였다.

    그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이 있어 왕이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 주로 이용하였고,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참배할 때 경복궁터를 길로 삼으면서 신무문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신무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후 1954년 경복궁이 일반인에게 개방될 때 함께 개방되었으나,

    19615.16군 사정변 이후 군부대(당시 30사단, 훗날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면서 폐쇄되었다.

    이후에도 청와대 정문과 마주하고 있어 보안 및 경호 등의 이유로 비공개로 남아있다가,

    2006929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집옥재 권역과 함께 개방되었다.

    신무문의 개방을 끝으로 경복궁에는 비공개 권역이 사라지게 되었다.

    1963121일 경복궁 전체가 사적 제117호로 지정될 때 신무문도 함께 포함되어 지정되었다.

     

     

     

     

     

     

     

     

    청와대 정문과 마주한 신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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