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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씨 5문장비(허엽, 허성, 허봉, 허초희, 허균)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7. 6. 25. 23:30

    허씨 5문장비(허엽, 허성, 허봉, 허초희, 허균)

     

    강원도 강릉 양천 허씨의 명문가에서 아버지 초당 허엽과 김씨 부인 사이의 세 자녀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은 첫째 한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악록 허성과 함께 허씨5문장으로 불렸다.

    허씨 5문장은 우리 문학사에서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들에게 강릉은 고향이자, 문학의 터전이며, 안식처였다.

    개혁가이자 자유인이었던 허균이 관직에서 멀어지거나 어머니가 그리울 때 찾아온 땅이자,

    조선시대 최고 여류시인이었던 허난설헌에게 문학적 향기를 불어 넣어 주었던 곳도 역시 강릉이다.

    강원도 강릉 초당동에는 허씨5문장을 기리기 위해 허씨5문장시비가 세워져 있다.

     

    허균이 말하는 허씨 5문장가는

     

    교산 허균(1569~1618) : 나는 비록 불초하나 또한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文藝)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들어가고 중국 사람에게서 제법 칭찬을 받는다

    허균은 홍길동전에 저자로 율도국과 같은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다 역적으로 몰려

    3대가 멸하는 벌를 받기까지 여러 번의 파직과 복직을 했다고 한다

    허균이 복직될 수 있었던 계기로 중국에서 오는 사신이 우리나라를 얕보는 경우가 많아서 대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허균은 중국 사신 앞에서도 당당하게 잘 해냈다고 한다

     

    난설헌 허초희(1563~1589) : “자씨(姊氏)의 시는 깨끗하고, 장하며,

    높고 고와서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진신사부가 모두 칭찬한다.”

    허난설헌으로 더 잘 알려진 허초희는 15세의 나이에 김성립과 혼인하여 남편의 외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아들과 딸을 모두 잃고 뱃속의 아이도 유산하였고 혈육이었던 허봉 마저 귀양가는 등

    불행한 삶을 보낸 허초희는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기 전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낀 허초희는 그동안 자신이 썼던 글과 그림 모두 태워버려

    현재 남아있는 글과 그림은 많지 않다고 한다.

     

    하곡 허봉(1551~1588) : “중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孤高)해서 근대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악록 허성(1548~1612) : “백형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또한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초당 허엽(1517~1580) :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은 사림에서 추중(推重)하였다.”

     

     

     

    高城 海山亭(고성 해산정)

     

    聞說新開第一區(문설신개제일구)

    海山高揭嶺東陬(해산고게영동추)  

    天慳地秘森呈露(전간지비삼정로)

    詩興何人浩莫收(시흥하인호막수)

     

    고성의 해산정에서

     

    草堂 許曄(초당 허엽)

    들리는 말에는 새로 좋은 터전을 마련해서

    영동의 한 모퉁이에 현판을 높이 걸었다지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었던 곳에 우뚝 솟아나서

    어떤 사람이 시흥에 겨워 어찌할 줄 모르고 있네.

    이동철

     

     

     

    초당 허엽(草堂 許曄, 1517~1580)의 자()는 태휘(太輝)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의 재상(宰相)으로 청렴하기로 이름난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선조 때의 문신으로 군자감 부봉사(軍資監 副奉事)인 한()의 아들이다.

    명종 1(1546)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고

    동인(東人)의 우두머리로 30년의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도 생활이 청렴하였다.

    첫 부인 한씨에게서 두 딸과 허성(許筬)이 태어났고, 김광철(金光轍)의 딸인 둘째 부인의 소생(蘇生)으로는

    허봉(許篈), 허초희(許楚姬), 허균(許筠)이 있었으며, 초당선생문집(草堂先生文集)이 전한다.

     

     

     

    야등남루(夜登南樓)

     

    招提日落倚沙門(초제일낙의사문)

    絶壑沈沈暝色昏(절학침침명색혼)

    十里孤燈明滅處(십리고등명멸처)

    隔江遙認廣陵村(격강요인광릉촌)

     

    밤에 남루에 올라

     

    악록 허성(岳麓 許筬)

    절간에 해 저물어 사문에 의지하니

    어두운 깊은 골짝에 밤빛이 짙어가네 

    멀리 외등불이 가물거리는 곳

    강 건너편 광능촌이 그 곳임을 알겠네

    이동철

     

     

     

    악록 허성(岳麓 許筬, 1548~1612)의 자()는 공언(功彦)이다.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으로부터 학문(學文)을 사사(師事)받았으며,

    1583문과에 급제한 이후, 벼슬길에 올라 부친의 뒤를 이어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吏曹), 예조(禮曹), 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교서칠신의 일인으로 천성이 정직하고 충효에 힘을 썼다. 옳은 일은 끝까지 관철(貫徹)시켰고,

    문학뿐만 아니라 성리학(性理學)으로 문명을 떨쳤다저서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灤河(난하) 

     

    孤竹城頭月欲生(고죽성두월욕생)

    灤河西畔聽鐘聲(난하서반청종성)

    扁舟未渡尋沙岸(편주미도심사안)

    烟譪蒼蒼古北平(연애창창고북평)

     

    난하에서

     

    하곡 허봉(荷谷 許篈)

    고죽성 마루에 달 떠 오르려 하니

    난하 서쪽 성에 종소리 들리어라 

    각배로 건너지 못해 해안가 찾으니

    조수목이 푸르게 덮힌 곳 옛북평이구나

    장정룡

     

     

     

    하곡 허봉(荷谷 許篈, 1551~1588)의 자()는 미숙(美叔)이다.

    형과 함께 유희춘(柳希春)에게 글을 배워 17세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을 하였다.

    33세에 성절사(聖節使),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좌랑(吏曹佐郞)의 벼슬로 동인(東人)의 선봉(先鋒)이 되었고,

    부수찬 교리(副修撰 校理), 창원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율곡 이이(李珥)를 논하다가 탄핵(彈劾)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성격이 강직한 탓에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금화 생착역에서 38세로 병사하였다.

    이달(李達)과 친했고, 사명당(四溟堂, 1544~1610)과도 교분을 맺었다.

     ()와 문장(文章)이 뛰어나 해동야언(海東野言)’ 외에 많은 글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하곡집(荷谷集)’이 있다.

     

     

     

    竹枝詞 三 (죽지사 삼)

     

    家住江陵積石磯(가주강릉적석기)

    門前流水浣羅衣(문전유수완라의)

    朝來閑繫木蘭棹(조래한계목난도)

    貪看鴛鴦相伴飛(탐간원앙상반비)

     

    죽지사.3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

    장정룡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1563~1589)의 자는 경번(景樊)으로 강릉 초당에서 출생하였으며, 초당 엽()의 딸이다

    1577년경 안동 김씨 성립에게 출가하였으나, 27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였다.  

    허균은 훼벽사에서 나의 돌아가신 누이는 현숙하고 문장도 지녔으나 시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고,

    또 두 자식까지 잃어 마침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늘 생각하며 몹시 슬퍼하길 마지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시 작품이 213, 산문이 2(규원가, 봉선화가)이 있는 동양 삼국의 가장 으뜸인 여류 시인으로 문집에는 난설헌집이 있다.

     

     

     

     

    湖亭(호정

     

    烟嵐交翠蕩湖光(연남교취탕호광)

    細踏秋花入竹房(세답추화입죽방)  

    頭白八年重到此(두백팔년중도차)

    畵船無意載紅粧(화선무의재홍장)

     

    경포호 정자(鏡浦湖 亭子)

     

    교산 허균(蛟山 許筠)

    연기 안개 푸른데 호수 빛 넘실거려

    가을 꽃 밟고서 죽방으로 들어가네

    머리 희고 팔 년 만에 다시 와 보니

    그림배에 홍장 싣고 갈 뜻이 없구나

    엄상섭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의 자는 단보(端甫)로 초당 허엽(草堂 許曄)의 막내이다.

    사천(沙川)에서 출생하였으며, 1594년에 등과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禮曹)와 호조(戶曹)의 참의(參議), 좌참찬(左參贊) 등의 벼슬에 올랐다.

    정치적인 모험과 자유분방한 성향에 의해 기인적 삶을 영위하였다.

    고려조(高麗朝)의 이규보(李奎報)를 잇는 위대한 문인으로 (), (), () 삼교(三敎)를 체득한

    중세기의 혁명가적인 사상가로 광해(光海 10, 1618)에 생을 마감하였다.  

    국문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으며, 그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조선조 최고의 명시선인 조선시선(朝鮮詩選)’을 각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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